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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영화평론가
그들의 소요는 한가롭고 한심하다. 허름한 동네 뒷골목을 걸으며 실없이 낄낄대거나 일찌감치 낮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파편적이다. 사건에 맥락 같은 것은 없다.

다짜고짜 행인을 뒤쫓아가 때리거나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이 없어지는 일도 가능하고 전신마비였던 사람이 뜬금없이 말을 던지는 일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소요는 꿈을 닮았다. 아름답지만 쉽게 부서지고, 평온하지만 애잔하다.

장률 감독의 '춘몽'은 허깨비 같다. 흑백의 영상에 줄거리는 쉽사리 요약되지 않는다. 마치 잠에서 깨어 꿈을 떠올릴 때처럼 뿌옇고 막연하다. 때로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고 때로는 처연하지만 돌아보면 꿈처럼 희미하다. 장률 감독은 '풍경'이나 '경주'에서 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이방인이 꾸는 꿈,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꿈들은 회귀에 대한 욕망과 닿아있다.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어서 그 꿈들의 끝에는 마음의 뿌리로서의 고향이 있다. 그리고 '춘몽'의 청년들이 동네를 배회하다 돌아오는 곳은 '고향주막'이다.

생각해보면 꿈이란 삶의 가장자리에 있다. 그것은 허상과 현실을 가로질러 우리의 일상에 끼어들지 못한다. 꿈이 닫혀야 일상이 시작되고 현실이 닫힐 때 비로소 꿈이 열린다. 전신마비로 온종일 휠체어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예리부는 꿈과 현실을 동시에 사는 사람이다.

'고향주막' 주변을 서성이는 세 청년들은 각기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 출연한 충무로의 젊은 감독들이다. 장률 감독은그 캐릭터들을 그대로 가져온다. '똥파리'의 양익준, '무산일기'의 박정범, '용서받지 못한자'의 윤종빈이 그들이다. 영화란 빛과 그림자의 허상이며 카메라가 꾸는 꿈이다.

그러나 세 감독들은 실재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다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허상만은 아니다. 그들은 실재와 허상이 겹쳐진 인물들이다.

꿈을 닫지 못한 채 현실을 살고 현실을 끝내지 못한 채 꿈을 꾼다. 마치 예리부처럼 말이다. 꿈속에서 나와 다시 꿈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질문하는 듯하다. 내가 꾸는 꿈을 보았느냐고.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