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지방관 공과 무관하게 건립
관아 중심으로 '비석 거리' 형성
조선후기 사회명암 반영된 유적
조선시대는 수령의 인품과 치적을 새겨 기린 선정비(善政碑)를 만들어 세우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선정은 정치를 잘했다는 것으로 불망비(不忘碑), 애민비(愛民碑), 청덕비(淸德碑), 청백비(淸白碑), 공덕비(頌德碑) 등으로 호칭했는데, 칭송의 의미를 담은 두 개 이상의 단어를 합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방행정의 중심인 관아 주변에 세웠고, 선정 여부를 불문하고 지방관을 지낸 인물을 대상으로 세우는 것이 관례화된 만큼 그 수량이 수십여 기를 넘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선정비가 세워진 곳은 이른바 '비석 거리'가 되었다.
조선시대 선정비는 처음에는 백성을 아끼고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대상으로 건립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례화되어 명예를 위하여 거짓으로 비를 세우거나 아랫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비를 세우게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선정비 자체가 가렴주구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선정비를 분석한 논문을 보면 선정비에 기록된 수령 중에서 선정비에 걸맞은 이력을 가진 인물은 20%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있다.
구체적으로 북한산성의 선정비 28기를 두고 보더라도, 주인공의 행적이 밝혀진 7명 중에서 신명순(申命淳)과 이규원(李奎遠)은 선정비에 어울리는 인품과 치적을 지녔으나, 북한산성 내 승병대장이었던 성능(聖能)을 비롯하여 김병기(金炳冀), 김문근(金汶根), 민겸호(閔謙鎬), 민영준(閔泳駿), 이유수(李惟秀) 등은 비리에 연루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로는 북한산성의 경리사(經理使)를 맡았던 민영준(閔泳駿, 1852~1935)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들 수 있다. 그는 1891년에 북한산성 책임자로 임명돼 성곽을 보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는데,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주역이었다.
황현(黃玹)이 지은 '매천야록'에는 민영준을 "정권을 훔쳐 농간을 부리며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고 평가해 놓았다. 변신을 거듭한 민영준은 뒷날 친일파의 앞잡이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럼에도 그가 거쳐 간 곳마다 선정비가 세워졌으며 용인 마북리에 소재한 그의 영세불망비에는 '비독어국 뇌급어민(?篤於國 賴及於民)' 곧 "나라의 크나큰 도타움에 백성들이 힘입었네"라고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경기(京畿)에는 목(牧) 1, 도호부(都護府) 8, 군(郡) 6, 현(縣) 26 총 41개의 지방통치기구가 있었다. 또 북한산성의 총융청, 남한산성의 수어청,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의 사옹원 분원 등의 특수기관도 있었다.
이런 경기 소재의 관청에는 수령이나 책임자가 파견되었고 그들이 떠날 때에는 재임 시의 공과와는 무관하게 선정비가 세워졌을 것이다. 따라서 경기도 전역에는 관아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선정비가 무리지어 있고, 이런 까닭에 선정비는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문화유산이라 단정할 수 있다.
이렇듯 선정비는 가장 흔하면서도 조선후기 사회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지방관의 착취와 폭정 아래에서 숨죽여 살면서도, 재물을 마련하여 그들의 악정을 선정으로 칭송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충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아울러 조선시대 인물의 경력을 연구할 수 있는 금석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선정비들에 대한 우리의 연구와 활용은 낙제점이다.
이런 현실에서 '경기도 소재 선정비 종합 현황집'의 발간, 선정비 속의 인물 연구, 선정비를 통해 본 경기도의 수령, 선정비의 형식과 변천, 선정비의 역사적 의미와 생산적 계승 등과 같은 조사와 연구는 물론, 문화콘텐츠의 생산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