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국이 1895년 세운 최초 극장이자 공연장인 '협률사'가 전신
외부 1960년 건축 모습 '그대로' 벽돌조 단층서 수차례 걸쳐 증축
지역 학생들 만남의 장소로 이름 떨친 경동에 남은 유일한 극장
사람이 몰리는 곳에 음식점이나 술집, 공원 등 유흥시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1888년 응봉산 일대에 자리 잡았고, 대불호텔이나 공화춘, 중화루 등 대형 식당들도 이 시기에 차례로 문을 열었다.
1901년 당시 내리교회에서 근무하던 존스 목사(한국명 조원시)는 회고록에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3개의 영사관, 2개의 극장, 7개의 은행, 다수의 목욕탕, 수 개의 교회단, 수 개의 호텔 등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1933년에 발간된 '인천부사'에도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했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년)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으로 신축해 '인천좌(仁川座)'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이보다 앞서 인천에 자리 잡은 극장은 지금의 애관극장에 세워진 '협률사(協律舍)'다. 협률사는 당시 인천 최고의 부호로 불렸던 정치국(1865~1924)에 의해 만들어졌다. 조선인이 만든 우리나라의 최초 극장이자 공연장인 것이다.
협률사는 1908년 이인직이 개관한 원각사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으로 알려진 조선 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협률사'(協律社·인천의 협률사와 한자가 다름) 보다 앞선 1895년에 설립됐다.
강덕우 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1895년 당시 인천 거주 일본인이 4천148명이었고, 서울은 1천939명이었다"며 "당시 극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서울보다 빨리 인천에 극장이 생겼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향토사학자인 최성연은 1959년 '개항과 양관 역정'에서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愛館)의 전신으로서, 청일전쟁(1894~1895) 중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협률사는 개관 당시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다. 매일 '박첨지', '흥부놀부전' 같은 인형극에서부터 창극이나 신파연극 심지어는 아직 명맥이 유지되고 있던 남사당패의 공연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명 연극인들이 많았다. 인천 주안 출신 배우 서일성(1906~1950)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연출가 정암을 배출하기도 했다.
지난 5일 인천 중구 경동에 있는 애관극장을 찾았다.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이름이 '축항사(築港舍)'로 바뀌었다가 1926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애관'으로 다시 개명됐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된 것이다.
현재 애관 극장은 1926년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손실되고, 1960년 개보수를 마치고 400석 규모의 극장으로 재개관한 데 이어 2004년 전면 개보수를 통해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애관극장 외부는 1960년 건축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벽돌로 마감된 외부는 곳곳에 모자이크 타일이 장식돼 있는데 이는 최초 건축 당시부터 현재까지 몇 번의 변화과정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애관극장은 설립 당시 벽돌조 단층 건물에서 2층으로 수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증축이 이뤄졌다.
1960년대 인천에 영화붐이 일어났다.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경동은 시네마거리로 불릴 정도로 극장이 많았다. 동방극장을 비롯해 문화, 미림, 오성, 인영, 인천, 인형, 키네마, 현대극장 등 인천 지역 대부분 극장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우리나라 영화예술의 꽃을 피운 토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애관은 영화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연주회장으로도 명성이 있었는데 20세기 최정상급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레너드 번스타인(1916~1990)의 피아노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애관극장 앞은 인천 지역 학생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였다. 당시에는 놀 거리나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애관극장이 있는 경동에서 만나 영화도 보고 음식을 먹었다"며 "특히 애관극장은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시기에는 아침부터 나가야 겨우 저녁 영화 티켓을 구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지금 경동을 지키고 있는 극장은 애관극장밖에 없다. 키네마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은행이 들어섰고, 동방극장이 있던 곳은 공영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김 전 대표는 "아무래도 개인 기업이기 때문에 지자체가 나서서 지키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지만, 인천 문화의 상징 같은 곳을 허무하게 흘려보내 너무 아쉽다"며 "마지막으로 남은 애관극장이라도 지자체가 보전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것을 지키는 것이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