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701000445100020511
이대연 영화평론가
좀비는 흔히 뱀파이어와 비교되지만 사실 그 원형은 아이티의 토속 종교인 부두교에 있다. 그들은 악의적인 주술로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불투명한 의식을 지닌 채 혹독하게 착취당하는 농장노예에 불과하다.

영화에 처음으로 좀비가 등장하는 것은 할페린 감독의 <화이트 좀비>(1932)지만 대중적인 장르로 재탄생한 것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통해서였다.

장르서사라는 것이 대개 당대 사회를 투영하게 되는데 좀비영화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포의 대상을 포착해 보여준다. 예를 들자면 '화이트 좀비'에서는 흑인 해방에 대한 백인들의 공포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는 핵무기와 냉전에 대한 두려움을 함축하고 잇다.

그런데 좀비에게는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의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시체이면서 움직이고 돌아다닌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인 것이다. 무덤에 있어야 할 죽음의 얼굴을 목격하는 순간 과거 지인과 친지들의 죽음과 미래 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일상은 낯선 두려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러한 좀비의 근원적 공포는 2000년대 이후 재난서사와 만나며 새롭게 재탄생한다.

이를테면 최근 '부산행'에서 보여준 것처럼 좀비는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고 감염시키는 위험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탐욕스러운 권력과 금권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결국 좀비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와 불안의 표출인 것이다.

불경스럽게도, 엄청난 숫자와 느릿느릿 걷는 외관의 유사함 때문에, 광화문에 운집한 군중들에게서 좀비를 떠올렸을 때, 그것은 촛불시민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위에 오버랩 된 죽음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당연하게도 어떤 죽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죽음은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정권과 기업이 만들어낸 재난서사에 의해 희생된 세월호의 죽음이었다. 거리를 흘러가는 190만 개의 촛불이 190만 개의 세월호처럼 보였다. 그 위로 거대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촛불시민을 내려다본다.

진도 앞바다 명량에서 대군에 맞서 승리하고도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해간 배 한 척을 구하지 못한 장군의 뜨거운 눈물이 촛농이 되어 떨어지는 듯했다. 이 기회에 세월호의 비극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