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 경제사정 좋지않아
'의료·약·술·극장'등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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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광고의 유형과 내용·방식 등을 살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상의 흐름을 읽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의 관심과 생활양식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발행된 대중일보에 실린 광고란을 보면 당시 대중일보 배포권역의 사회상이 그대로 노출된다. 대중일보 발간 초기엔 정치 집단의 광고가 많았다.

고려청년당 인천지부,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준비회 인천지부, 인천지구 노동조합, 인천노동자실업대책위원회, 조선건국준비회 인천지부, 한민당 인천지부 등이 대중일보 창간호에 광고를 냈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기, 다양한 지향점을 가진 정치세력이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인천시청,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인천검찰청, 인천경찰서, 인천세무서, 인천항무청, 인천우편국 등 관공서는 신년 '하정(賀正)' 광고와 창간기념 광고 등을 냈다.

인천물산주식회사, 가구전문제조 '화성상회' 등의 광고도 일부 있었지만 주로 냉면 전문점 '경인식당' 등 음식점 광고와 병·의원, 약방 광고가 많았다. 인천 궁정 11번지에 있던 '다이야빠', 상인천역전 고급 사교장 '신라', 애관극장 등 영화관 광고도 실렸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당시는 의료·약 및 술 광고, 극장 광고 등이 대부분이었다"며 "일제 말 공장 등 산업시설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조업체 광고는 많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광고를 제작해 신문에 실을 만큼 좋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해방 직후 복간한 동아일보의 경우 1940년 8월 폐간 직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광고 비중이 45%에 달했지만, 복간 직후엔 20% 수준에 불과했다.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재입사해 광고업무를 맡은 김승문씨는 해방 직후 광고상황에 대해 "그 혼란 통에 광고는 개무(皆無·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한국광고발달사'에서 밝히고 있다.

대중일보 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화려해 졌다. 직원과 학생 등 모집광고가 실리고, 조선성냥주식회사, 동양방적공사 인천공장, 대한제분회사 인천공장 등으로 외연이 넓어졌다.

서울지역 업체 광고도 실렸는데, 서울 남대문 자유시장 내 물감도매업체인 '유풍양행'과 서울 중구에서 각종 미싱부속품 등을 파는 '남광상사'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엔 좌익단체에 몸담았던 인사의 탈퇴성명서가 광고형태로 실리기도 했다. "해방 후 좌익분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가입한 단체가 살인·방화·파괴 행동을 일삼고 조국재건에 백해무익함을 자종(自從)해 동 단체를 탈퇴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