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인천을 거느리던 도시… 행정·국방 주요 역할
1127년 창건 인천향교처럼 조선시대 중·고등학교
홍살문→외삼문→명륜당·동재·서재 순으로 배치
그 뒤 대성전엔 공자 등 5성위·유학선현 25위 봉안

부평의 이름은 고구려 때 주부토에서 통일신라 때 장제군,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940년 수주, 1150년 안남도호부, 1215년 계양도호부, 1308년 길주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310년 부평부, 1413년 조선 태종 때 부평도호부가 된다.
고려 현종 때 원인천 지역은 수주에 속했던 소성현이었다. 부평은 지방관이 파견됐던 고을이었던 반면, 인천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었다. 현재와는 다르게 부평이 인천을 아래에 거느리는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당시 부평은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 인천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를 담당하는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군사기지 도시 구축계획에 따라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 부평은 따로 도호부가 설치됐을 정도로 독립된 역사를 간직한 도시였다.
인천이 문학산을 주산으로 하는 해양 권역에 자리 잡은 곳이라면 부평은 계양산을 주산으로 하는 내륙의 넓은 평야를 거점으로 한다.
이 때문에 부평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행정이나 국방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오래전부터 한양에 인접한 드넓은 평야지대인 데다 항구와 인접한 곳으로 바다와 내륙의 접점에서 벌이는 수많은 행정이나 사업의 본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 남구 문학동에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것처럼 계양구 계산동 부평초등학교에는 '부평도호부청사'가 남아있다. 남구 관교동에 당시 공교육을 담당하던 '인천 향교'가 있었듯이 계양구 계산동에는 '부평향교'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20일 인천 계양구 계산동에 위치한 부평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12호)를 찾았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시설로 '향촌(지방)에 있는 학교'라는 뜻이 있다. 당시 서울에는 향교가 아닌 사부학당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했다.
부평향교는 1127년 계양산 남쪽에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636년 병자호란으로 불에 탔고, 1688년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
원래는 입구인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외삼문(外三門)을 통해 들어가는 구조로 돼 있지만, 홍살문과 외삼문 사이에 소방도로가 생기면서 외삼문이 실질적인 문이 됐다.
외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 역할을 하는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돼 있다. 이곳에서 70명의 학생이 숙식을 해결하며 과거 준비를 했다고 한다.

명륜당 뒤에 위치한 내삼문(內三門)을 지나면 대성전(大成殿)이 나온다. 제향 공간인 대성전에는 5성위(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와 안향,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비롯한 유학의 선현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그 앞에는 수령 1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의 모든 향교나 서원 등 교육기관에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공자가 처음 제자들을 모아 강의했던 곳이 은행나무 아래였기 때문이다. 부평향교는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 공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 배치로 구성돼 있다. 유교적 이념에서 보면 옛 성현들이 앞에 있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뒤에 있어야 하지만 전국 향교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부평향교관리재단 관계자는 "우리나라 향교는 대부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앞쪽이 낮고, 건물 뒤편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이에 앞쪽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면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현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이에 대지 경사에 맞춰 건물 간 위치를 설정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번성했던 향교는 조선 중기 이후 사액 서원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요즘 시대와 비교해보면 자립형 사립고가 생기면서 부잣집 아이들이 공립학교에 가지 않고, 사립고로 몰리는 형태가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향교는 교육 공간보다는 제향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갖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고 부평과 인천은 하나로 합쳐졌다. 인천항 주변에는 개항 초기 항구를 중심으로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기 시작됐고,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시가지는 부평 등 내륙으로 더 넓어졌다. 도시의 확장으로 문화가 다른 두 곳이 하나가 됐지만, 10여 년까지만 해도 부평과 인천은 서로 섞이지 못했다.
인천 부평지역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이곳에서 자라온 '부평 토박이'들은 같은 인천시(市)에 살면서도 자신을 '인천사람'이 아닌 '부평사람'이라고 외지인들에게 소개했다. 바닷가 인천사람과 내륙에 가까운 부평사람은 분명 달랐고, 서로가 낯설어 구분 짓는 일이 반복되며 습관이 돼 버린 것이다.
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부평이 인천에 편입된 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둘을 구별하는 것이 많이 퇴색됐지만, 아직 일부에서는 서로 녹아들지 못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다"며 "이제는 열린 생각을 갖고 하나의 인천으로 힘을 합쳐야 할 시기가 됐다"고 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