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출신 엄마 둔 동갑내기 유치원때 만나
정체성 혼란없이 판사 되고픈 평범한 소녀
고양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창작교육 통해
감수성·잠재력 돋보인 '동시' 책으로 출간
부모들 "고입·대입등 고급 교육정보 필요"
모씨의 딸 혜림이와 왕씨의 딸 예은이는 9살 동갑내기 절친이다.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같은 마을에 사는 두 소녀는 닮은 점이 많다. 엄마 아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동딸이고, 중국어를 우리말 버금가게 구사한다. 매년 꼭 한 번 중국 외갓집에 놀러 가는 것도 판박이다.
혜림이와 예은이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비슷한 듯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대통령과 판사가 되고 싶다는 장래희망은 똑같다.
여기에 더해 혜림이는 우주비행사와 대학교수의 꿈이 있다. 특히 교수는 "하버드대학교"라고 혜림이는 구체적으로 짚어줬다. 중국에서 한의사였던 모씨는 "혜림이 외할아버지가 중국 법관을 지냈다"고 귀띔했다. 예은이는 과학자와 발명가의 꿈이 추가로 있다.
집에서 고양이를 비롯해 수백마리 곤충을 키우며 관찰하는 게 중요 취미활동인 예은이는 방과후수업 '생명과학' 교과를 무척 즐거워한다. 예은이는 남북통일도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통일을 하고싶느냐고 되묻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혜림이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온 가족이 한국에 살게 된 건 혜림이가 4살 때다. 모씨도 한국말을 못할 때였기 때문에 아이 언어 문제로 가족들의 걱정이 컸는데 혜림이는 금세 한국어를 익혔다. 예은이는 태교도 책으로 했다. 신혼 초기만 해도 왕씨의 한국어 실력은 완벽하지 않았으나 일부러 한국말로 책을 읽고 또 읽어줬다.
모씨와 양씨는 "언어문제로 고민하던 당시 아이들에게 책보다 좋은 선생님이 없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두 엄마는 지금도 틈만 나면 아이들을 인근 백석도서관에 데리고 간다.
혜림이와 예은이는 5살 때부터 유치원에서 붙어 다녔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라 소외됐던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물었더니 엄마들은 손사래를 쳤다. 아이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여태까지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한국 소녀의 일과는 '왔다 갔다 엄마 생일'이라는 제목의 예은이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중략)엄마아빠가 옷을 입고 나갔다. 그런데 와보니 내가 싫어하는 음식축제였다. 나는 양꼬치만 먹고 엄마아빠랑 같이 엄마옷을 샀다. 엄마가 많은 옷가게를 들러서 발이 아팠다. 나는 또다른 가게를 갔다가 발이 아파서 넘어질 뻔했다. 집에 와서 생일파티를 하고 잠을 잤다. 참 힘들고 재미있었다."
엄마들은 혜림이와 예은이가 어릴 적부터 그냥 죽이 맞았다고 회상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 매일 저녁 8시에 만나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놀았다.
요즘은 학원까지 같이 다니며 어울린다. 틈만 나면 디즈니주니어 채널 만화이야기와 "고양이가 햄스터를 먹을 뻔했다"는 등의 애완동물 에피소드로 수다를 떤다. 친구가 되어가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걸 두 아이는 새삼 깨닫게 했다.
이렇게 단짝이긴 해도 좋아하는 음식은 제각각이다. 예은이는 엄마에게 닭날개 요리와 꽃게탕, 국수를 만들어 달라고 자주 조른다. 혜림이는 과일이라면 전부 좋아한다면서도 나지막이 "치킨, 피자, 족발도 좋아해요"라고 속삭였다. 뒤에 몇 발짝 떨어져 있던 모씨 앞에서 혜림이는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마 전 고양시는 혜림이와 예은이가 일상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써내려간 문학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고양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다문화가정 청소년교육지원사업 '생각 쑥쑥 꿈도 쑥쑥' 동시·동화책이 출간(경인일보 11월 14일자 11면 보도)된 것이다.
센터는 동화작가·시인·출판사·스토리텔링멘토를 연계해 창작을 도왔고, 아이들은 문화감수성과 잠재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혜림이와 예은이는 이번 겨울 중국에 가서 사촌들에게 책을 보여줄 예정이다.
인터뷰 말미, 모씨와 왕씨는 일산이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이라고 칭찬했다. 공원과 체육관, 백화점이 가깝고 특히 도서관 등 공공시설을 이용하기가 무척 편하다는 것이다.
엄마들은 다만 아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고급 교육정보'가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국가가 많은 지원을 해주는 건 고맙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시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고 했다. 정부의 다문화가정 지원책이 기존 한국인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접근할 필요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고양시는 혜림이와 예은이가 꿈을 잃지 않도록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아이들이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인재로 커가는 사이, 평화인권도시로 자리매김하려는 고양시의 꿈도 영글어가고 있다.
고양/김재영·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