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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일보는 혼란하기만 했던 해방공간의 숨 가쁜 하루하루를 꼼꼼히 기록했다.

전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새로운 문물과 신지식을 찾아 항구 도시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인천은 개항 때부터 해외의 신문물이 조선으로 들어오던 관문이었다. 다양한 사상과 사람이 뒤엉켰고, 이는 인천을 더욱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부대낀 곳도 인천이었다.

대중일보는 그렇게 인천에서 첨예하게 대립한 좌익과 우익 진영 간 대립과 갈등을 담아냈다.

대중일보가 남긴 지면 속 시민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각종 범죄도 잦았다. 집을 구하는 일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도시민들이 쌀을 구할 수 있는 공식 창구였던 양곡 배급소는 저울 눈을 조작해 실제보다 적은 양의 쌀을 나눠주고 남은 쌀을 암시장에 팔아 잇속을 챙기기 일쑤였다. 높은 실업률과 끊이지 않는 강력범죄, 주택난, 공적 기관의 비위행위 등은 지금도 여전하다.

대중일보는 과감한 사회 비판에도 적극적이었다. 거리에 많아지고 있는 '카페'에서 덮어놓고 술이나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은 건국도정을 좀먹는 일이라며 "삼가라"고 했다.(1945년 12월 14일)

또 송림동·송현동 등지에 대규모 도박장이 공공연히 열려 수많은 도박꾼이 활개를 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경찰을 비판(1947년 4월 3일)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왜색(倭色)을 걱정했고, 국회의원 총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천으로 밀려드는 궁핍한 처지의 전재 동포를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중일보는 당시 시민의 소소한 일상을 지면에 담았다. 옹진군 부포항을 찾아 조기잡이 상황을 르포(1948년 5월 21일)로 전하기도 했으며, 자신과 다투다 기절한 며느리가 죽은 줄 알고 경찰에서 "내가 죽였다"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노인의 모습(1948년 5월 13일)을 담기도 했다.

대중일보의 해방 후 첫 새해의 각오는 남달랐다. 고주철 대중일보 사장은 해방 후 첫해인 1946년 1월 1일 신년호에서 "민족통일 완전독립과 지방문화의 선양이라는 커다란 포부와 의욕을 가지고 대중일보를 만들었지만, 무력은 여실히 폭로되고 이렇다 할 만한 공헌이 없었으니 못내 부끄러움을 주체못하는 바이다. 새해를 맞아 앞으로는 일치단결로서 새 국가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는 그 후 70년이 지난 경인일보의 2017년 새해 각오로 이어진다.

그동안 몇 가지 주제로 나눠 대중일보를 읽었다. 그 일은 해방공간 혼란기를 살아갔던 시민의 삶과 모습을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네들의 삶은 지금 우리의 삶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