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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켄이 보따리장수처럼 초라한 진심을 늘어놓은 것을 후회하기도 전에
여자들은 옷을 재빨리 꿰어 입고 그 방을 떠났다
바비에겐 다른 공기가 있었다, 승려처럼 성냥탑 쌓기에 열중하는…
켄은 바비의 몸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버린게 두려웠다

연희가 진정 바라는 건 충실한 신하인지 증명해보라는 성의일 것이다
하지만 성형이라니… 카페 유리창 건너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보다 갸름했고, 피부가 희었고, 생각해보니 코도 더 얄쌍했다
귀족적 아이덴티티까지 코히시브젤처럼 이식할 병원을 알아봐야겠다


진한 커피는 꼭 사약 같다. 켄은 사극에서 머리를 산발한 죄인들이 들이키는 흰 사발을 떠올리며, 진갈색 액체를 머금었다. 윽, 재떨이 헹군 물 같군. 감각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아직은 본능적으로 단 음료가 더 끌린다는 자각에서 켄은 거꾸로 자신의 나이를 상기한다.

달콤한 카페모카. 부드러운 카푸치노.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 상큼한 생과일주스. 커피 전문점에 파는 음료는 많고 많지만, 그게 그거다. 커피들의 이름은 외우긴커녕 틀리지 않고 발음하기도 힘들게 길지만, 어차피 모두 에스프레소 원액에 시럽을 넣거나, 휘핑을 얹거나, 캐러멜 드리즐을 뿌린 것들이다. 여자처럼. 켄은 여자의 머리가 길건 짧건, 치마건 바지건, 붉은 입술이건 맨 입술이건 기억하지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리고 켄은 한 달 30일 중 29일은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때론 에스프레소 도피오 따위를 말할 때도 있다. 그건 그냥 그날의 날씨가 꿀꿀하기 때문인데, 같이 밤을 보낸 여자는 말한다. 켄, 넌 뭘 좀 아는구나. 켄이 대꾸 없이 입에 옅은 미소만 건 채 침묵하면, 여자들은 초조해하며 "출장 가서 특산물을 좀 샀어. 택배로 보내줄게." "쇼핑하던 차에 하나 고른 거야. 부담 갖지 마." 따위의 말들을 보따리장수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다. 켄에게 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잡동사니들을 파는 지하철의 할머니들이다.

그에게 진정한 오르가즘이란 한 달에 딱 하루, 설탕이나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마실 때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그걸 자주 느끼기는 한다. 하지만 단 커피 음료를 마실 때 그는 진짜 사정射精 할 때보다 전율한다. 달콤한 액체를 최대한 음미하려 천천히 들이킬 때, 그의 입천장과 목구멍과 위 내벽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역시 여자보다 낫다!

남창은 회사원만큼 힘들다. 반복 업무와 서비스 정신을 두루 요한다.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만 환멸을 느낀다, 여느 노동자처럼. 한 달에 한 번, 단 커피를 마시는 날은 보너스 지급일이라 생각한다. 또, 드물게 이런 여자들이 있다. 성기 뿌리에서부터 척추와 정수리 끝까지를 단숨에 타고 올라, 전체를 빨아들여 버리는 듯한. 그런 여자들은 대개 미인은 아니다. 오히려 외양만으론 작은 직장에 다니며 맞벌이를 할 법한, 평범한 주부 같은 여자들이다. 그런 여자와 잘 때만 켄은 여자란 존재에 대해 새삼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또 그녀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들의 빨판 같은 질이 판단력까지 빨아들여버리는지, 같이 잘 때면 켄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술을 그냥 놔두듯 나오는 대로 지껄이게 됐다. 이를테면 중학교 시절 땀내 나는 야구 유니폼을 입고 집으로 걸어올 때 금속 배트 끝이 아스팔트 표면에 퉁퉁 튕기는 진동에 대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첫 장에 아빠는 널 정말 사랑한다. 란 손글씨를, 어두워진 방에서 언제까지나 들여다보던 기억에 대해. 하지만 켄이 보따리장수처럼 초라한 진심을 늘어놓은 걸 후회하기도 전, 여자들은 옷을 재빨리 꿰어 입고 그 방을 떠났다. 진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진심은 그가 쓰는 초박형 콘돔 끝에 고인 정액이었다.

그런 날들 중 하루, 바비를 만났다.

바비는 서로 허리를 감고 비틀대며 괴성을 지르는 무리들과 떨어져, 혼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켄이 이쑤시개에 말라 비틀어진 오렌지를 꽂아 바비의 입가에 드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근래 보기 드문 칙칙함이다."

빗어 넘긴 머리가 보랏빛으로 물든 동료가 저만치 앉은 바비를 턱짓하곤 낄낄거렸다. 동료는 술인지 물인지에 가슴팍이 젖어 한쪽 젖꼭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른 동료가 단발머리 여자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한쪽 젖꼭지가 훤히 드러난 동료의 가슴팍에 들이밀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분위기는 질주하듯 달아올라 작은 룸은 우주로 쏘아질 것 같았다. 그 난리통에도 바비는 혼자 고즈넉한 정원에 앉아 있었다.

켄은 느슨해진 눈꺼풀로 바비를 뜯어보았다. 추녀. 튀어나온 광대뼈, 빗자루 털 같은 생머리, 거친 피부, 모지게 찢어진 눈, 엄청나게 큰 코를 갖고 있었다. 신체의 곳곳에서 건어물 냄새가 날 것 같은 여자. 켄에게 그런 종류의 여자는 무생물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수행하는 승려처럼 성냥 탑 쌓기에만 열중하는 바비에겐 다른 공기가 있었다. 진동하는 공기 속에 성냥개비 탑은 위태롭지만 재주 있게 쌓여, 어느덧 양주잔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가라오케가 흐느적대는 발라드로 바뀌자 사람들은 해산물처럼 미끈거렸다. 켄은 문득 끈적한 물속에 잠긴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바비의 성냥 탑이 무너질까봐 켄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수면 아래서 고개를 들듯 바비는 천천히 켄을 올려다봤다.

"같이 나가죠."

알코올에 들뜬 혀가 바람에 휘날렸다. 켄은 그날은 좀 쉬고 싶었다. 살갗이 양피지처럼 늘어진 여자의 팔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 안겨 있고 싶었다.

"바비씨."

"왜 날 바비라 부르지?"

"음."

"네가 아는 여자 중에 바비가 있니?"

"아니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왜 바비냐면, 아름다워서." 나오는 대로 뱉고 픽 웃었지만 여자는 무표정했다. 바비는 켄 쪽으론 일별도 않고 탑 쌓기에만 열중했다.

"나가기보단, 들어가자."

"어디로요?"

"여기로." 바비의 검지는 우물 정 자로 쌓인 성냥 탑 속을 가리켰다. 개미들에게나 안락할 보금자리였으나, 떨리는 테이블 위에서도 의외로 굳건히 서 있었다. 성냥 탑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달뜬 열기와 교성들이 켄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갔다.

휘핑크림을 두텁게 쌓아올린 음료를 받아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날씬했다. 그녀들의 종아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허리는 군더더기 없이 미끈했다. 하지만 켄은 그들을 사물처럼 그냥, 쳐다봤다.

그 밤은 특이했다. 바비는 켄이 같이 잔 여자들 중 못생긴 걸로 세 손가락에 들었다. 켄은 그날 이상하게 허둥댔다. 그녀가 못생겨서는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바비가 손을 그의 등에 얹었다. "애쓰지 마." 거칠고 메마른 손처럼 그 말엔 무게감이 있어, 켄은 움직임을 멈췄다. 바비 속에서 그는 말했다.

"중학교 때요."

"응."

"벤치 끝에 앉아, 혹시 감독이 내 이름을 크게 외쳐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거든요? 해가 무섭도록 시뻘건 늦은 오후였어요. 난 엉덩이를 들썩대면서 2루 쪽을 보고 또 봤는데,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안타를 쳤니?"

"아뇨, 결국 벤치만 지켰어요.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어요."

"대부분이 그런 날이지."

"견뎌야만 해요, 그럼?"

"난 그렇게 생각해."

순간 아, 짧게 소리 낸 켄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이런 실수 안 하는데. 아씨, 어쩌지." 콘돔을 착용하는 걸 잊었다. 켄은 바비의 몸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버린 게 두려웠다. "괜찮아, 난 불임이거든." 바비가 말했다.

"그 말을 믿니?"

도착한 바비가 말했다. 자연광 속에서 그녀의 외적 추함은 더 빛을 발했다. 그들이 만난 강남역 근처 카페는 영어 학원 근방이라 젊고 날씬한 여대생들이 바글거렸다. 이 넓은 카페 어디에도 바비 같은 여자는 바비뿐인 게 켄은 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신선하니까.

"상관없어요. 낳고 싶음 낳아요. 근데 책임은 못 져요. 내 처지 알잖아."

"너같이 예쁜 아들 낳아 혼자 기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허튼 소리. 근데 오늘 왜 보자 했어요?"

"성냥 탑이 궁금하댔지."

"내가요?"

바비와 밤을 보낸 후에도 켄은 여자들에게 여러 번 몸을 묻었다. 그 밤들은 그 밤대로의 즐거움이 있었다. 성냥 탑 따위도 거의 잊었다. 하지만 켄은 바비의 손을 잡고 카페를 걸어 나갔다. 사람들이 그들을 흘끔거릴 때, 켄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도 시선들을 흡수했다. 그는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볼 땐 뿌듯하고도 불안했다. 내 날렵한 얼굴선과 큰 눈, 올라붙은 엉덩이와 날씬한 다리가 시선들을 언제까지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 켄은 가끔 제 방 전신거울 앞에서 고장 난 오르골처럼 돌고 또 돌았다. 바비에게서 느껴지는 선선한 공기, 그건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사람의 초연함이었다. 켄은 그런 신선함을 맛본 적 없었다.

그들은 외딴 절처럼 교교한 한낮의 모텔을 찾았다. 켄은 낡은 가죽 같은 바비의 피부를 만졌다. 하지만 바비의 속은 켄에게 달고 진득한 커피 같았다. "성냥 줄 수 있는지 인터폰으로 물어봐." 바비가 말했다.

켄은 팬티 바람으로 앉아 위태롭게 쌓인 탑의 좁게 얽힌 안을 골똘히 들여다봤다. 바비의 것과 달리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초조함에, 켄은 손날을 공중에 휘둘렀다. 벤치를 지키는 동안 해는 지고,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떨어진 성냥들을 바비는 가만 보았다. 켄은 머리를 창턱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거 계속 만들 작정이야?" 그는 눈을 감고 모텔 바닥을 아무렇게나 손가락질했다.

"응, 나는." 바비의 말이 먼 곳에서 울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인터폰 속 남자가 대실 시간이 끝났다고 했다. 어지러운 머리로 눈을 뜨니, 침대 옆 원탁에는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완벽한 성냥개비 탑이 쌓여있었다. 나갈 때 카운터 직원은 켄이 혼자 들어왔다고 했다.

***

눈뜨고 홀을 한 번 둘러봤을 때, 여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에게 꽂히는 여자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무표정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어디에도 연희보다 예쁜 여자는 없다.

연희는 최고의 작품이다. 정확한 비례와 조화로 이루어진 새로운 생명체. 날렵한 버선코, 각이라곤 없는 얼굴, 랩을 씌운 듯 매끈한 상앗빛 피부. 안구 빼곤 전부 빚어진, 자연미 따위는 완벽으로써 가볍게 물리치는 신인류. 원시 부족처럼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저 여자들에겐 구시대의 유산이 역력하다. 좋게 말해 동양적이라 칭하는, 모로 찢어진 눈과 둥글게 퍼진 콧잔등, 억세 보이는 사각턱과 누르께한 피부. 아름답지 않은데 노력까지 않는 건 시대정신에 어긋난다. 노력은 문명이고, 우수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자산으로 검은 표범 같은 외제차나 삼천만원짜리 시계를 갖기 원하듯 연희도 그렇게 원했다.

"그린티 프라푸치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이태리제 물소가죽 로퍼가 카운터로 매끄럽게 걸어갔다. 칠천오백 원씩 삼십 번, 오케이. 수익은 투자를 훨씬 넘어설 거다. 돌아보니 연희는 몸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 아래 길고 흰 종아리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저 다리에 로우 킥을 날려 부러뜨리고 싶다. 그 상상이 머리를 덮침과 동시에, 그는 음료를 내민 여자 바리스타에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영화 대사를 생각하며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볼이 발개졌다. 돌아와 컵을 내밀자, 연희는 인상을 쓰며 손이 젖으니 종이 냅킨을 감아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연희의 명령을 따랐다.

"집 옮기려고."

"어디로? 설마 우리 집으로?" 그가 순간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자, 연희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뭔 소리야, 뉴욕에 있는 내 아파트."

"아…. 그냥 갖고 있지, 왜." 그는 연희가 물비린내 풍기는 천장이 경사진 욕실, 라면 면발이 말라붙은 냄비가 담긴 싱크대를 보고 경악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됐다.

"중동 쪽 이민자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들어오잖아." 연희가 빨대를 쪽쪽 빨았다.

"근데 오빠, 허리 사이즈 몇이랬지?"

"늘 이십팔이지, 왜."

"뱃살 좀 붙은 것 같은데."

"이틀에 한 번 헬스 나가. 이런 몸매 흔치 않은 거 알잖아."

"내가 뭐라 했었지?" 둘은 동시에 말했다. "비만은 미개다."

"뉴욕 가기 전에 오빠 허리 1인치 늘면 바로 차버릴 거야."

"그래그래, 오늘도 운동 갈게."

그는 핸드폰을 치켜들고 홈 버튼을 셔컥, 셔컥 눌렀다. 연희는 시선은 짐짓 먼 데 두고, 음료를 천천히 마셨다. 사진 속 연희는 내추럴하지만 자기 관리엔 충실하면서, 생활의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부티 나는 여자였다. 이것은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이 보는 연희의 모습이었다. 그는 실제 연희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 상관, 그는 헤어라인 시술을 받은 연희의 완벽하게 동그란 이마를 물끄러미 보다, 그녀의 지시대로 사진들을 어플로 편집한 후 전송했다.

연희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은 패션 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패션 디자인보단 외모와 집안이었다. 돈 있는 집안에서만 보낸다는 그 학교에도 연희처럼 둘을 겸비한 경우는 잘 없었다. 한편 그에게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입사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확률은 50%, 되거나 안 되거나. 자연계에서는 절대로 낮지 않은 확률을 놓칠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교만과 결핍을 읽었다. 머릿결과 피부엔 한 달에 각각 백만 원 넘게 투자하면서 사람 없는 데선 담배를 갈급하게 빨아대는 것, 사람들의 가십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즐기는 것. 그는 비뚤어진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부잣집 딸이라 그녀를 노렸다. 흠결 하나 없는 비단 같은 여자는 그가 닿을 수 있는 계급이 아니었다. 연희가 계급적 자부심을 깔고 마음껏 욕설을 뱉을 때, 창남인 그는 일부러 더 품위 있게 굴었다. 마침내 연희는 불운 때문에 밑바닥 환경으로 추락했으나 인성만은 고결한 그에 대한 경계를 거두었다.

갑자기 연희가 민첩한 동물처럼 척추를 세웠다. 시선을 따라가니, 유리창 밖 건널목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작은 두상과 해사한 얼굴, 긴 다리. 이 동네에 저런 애들 널렸지, 그는 심상히 고개를 돌렸지만 연희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싶어."

"뭐?"

"갖고 싶다고, 저런 애."

"야, 쟤랑 나랑 다를 게 뭐야. 그리고 저런 말라비틀어진 어린 애는 힘도 못 쓴다."

"너." 연희가 만난이래 처음으로 그에게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그는 연희의 완벽한 치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혜진이 냉장고에 차곡차곡 담아둔 유리 반찬통들을 꺼냈다. 호스트바를 찾는 유치원 선생을 사람들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재미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꽤 많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그가 여자들에게 몸을 팔며 사는 사실처럼. 혜진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앞치마를 자주 둘렀다. 혜진은 사랑스럽고, 요리도 잘 한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이란 낱말을 다섯 번만 발음하면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주는 혜진 같은 여자의 약함이 그는 싫었다. 이 세상의 지형도에서 약한 존재에 속하는 그는 연희의 강함을 원했다. 혜진이 만든 반찬을 집어먹으며, 그는 그녀가 식탁에 펼쳐놓고 간 잡지 기사에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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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외모 가꾸기가 여성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 남성들도 바야흐로 무한 외모 경쟁시대에 돌입했다.

은행원 A(30)씨는 지난해 '중대 결심'을 내렸다. "상사분이 소위 호감형인 동기와 제 실적을 비교한 게 계기였어요. 그 친구의 비주얼이 계약 성사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하더군요. 이젠 남자에게도 외모는 '스펙'임을 절감했죠." A씨는 휴가 동안 '대변신'을 감행했다. 코 시술과 눈매 교정술, 턱 보톡스, 수염 레이저 제모, 눈썹 왁싱을 받았다.

"처음엔 독한 놈이라 수군대던 동료들이 지금은 사내 메신저로 수술 정보를 슬쩍 물어 와요.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요즘 고객님들에게 지점 최고 미남으로 통용되기도 하고, 실적도 올랐어요. 대만족입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연희가 바라는 건 자신의 재력으로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연희가 진정 원하는 건 성의일 것이다. 네가 충실한 내 신하인지 증명해 봐. 하지만 성형이라니. 그는 피부과에서 레이저를 한 번 받은 것 외에 시술도, 수술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페 유리창 건너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 자신보다 갸름했고, 피부가 희었고, 생각해보니 코도 더 얄쌍했다. 음.

그는 핸드폰으로 기사 하단에 나온 병원 이름을 검색했다. 유명한 곳인 모양인지, 남자들의 아우성들 틈에 그 병원명이 간간이 끼어 있었다. "이마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주름 때문에 고민이에요. 필러, 레스틸렌, 보톡스 중 뭐가 나아요?" "휴가 동안 쌍꺼풀 예약해 놨는데, 간단한 수술이라지만 여름이라 혹시 덧나지는 않을지…." " '도시락'입니다, 25년 동안 불려온 별명. 저도 이제 여친 사귀고 싶어요." 콤플렉스에 찬 놈들이 이렇게나 많은지는 몰랐네, 그는 코웃음쳤다.

"임동민님. 임동민님, 어디 계세요?"

푹신한 소파의 여자들 틈에 끼어 앉아 유리 테이블 위에 성냥개비로 탑을 쌓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곧 서른인 탓인지 이차를 나간 다음날엔 부쩍 피곤했다. 급하게 일어나다 무릎이 테이블 모서리를 쳐, 성냥들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스튜어디스의 것을 모방한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허둥대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여직원이 인도하는 방에 들어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옷은 다르지만 방금 그 여직원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웃으며 앉아 있었다.

"상담실장 박신영입니다. 차트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네요." 수완도 좋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는 유니폼 아래에서도 양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가슴을 안 보는 척 흘끗 보았다.

"하긴 본바탕이 좋을수록 완벽해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죠. 원하시는 부위가 어디신지 짐작도 안 가지만요, 호호."

"그럭저럭 만족은 하는데요. 좀 동안으로 이미지 변신을 해볼까 해서요."

"그래요, 아주 갈아엎지 않으셔도 살짝만 터치해 주는 것만으로 확 달라지실 거예요. 워낙에 본판도 좋으시고, 저희 원장님이 또 동안 성형 쪽으로 전문이시잖아요."

"이마에 보형물을 넣으면 어떨까 해요."

"필러로 채우지 않으시구요? 보형물은 드물긴 하지만 물이 차고 두통이 오는 부작용으로 종종 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 병원은 양심이 있는 편이네, 그는 생각했다.

"필러는 계속 리터치 해야 된대서요. 휴가를 내기 힘든 직장이라." 사실 오늘 비번이라 성형외과에 상담을 올 수 있던 거였다. 낮에 잠을 충분히 자 두지 않으면 밤에 술을 마셔가며 춤추고 노래 부르기 힘들다.

"여의도 증권가 같은 데서 일하시는 거예요? 이미지가 스마트하셔서."

박신영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을 때 노란 덧니가 드러났다. 그 작은 불완전성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박신영이 자신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연희의 치아는 라미네이트로 덧씌운 대리석이었다.

"남자 분들은 아무래도 계속 병원을 방문하는 것보단 한번 크게 고생하시는 걸 택하는 편이죠. 근데 동민님, 혹시 가슴 확대엔 관심 없으세요?"

"네? 전 남잔데요." 박신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대기실 벽에 걸려 있던 코히시브 겔(cohesive gel)을 보셨나요?"

"여자들 가슴 수술에 쓰는 거잖아요." 그는 피부 밑에 든 그것을 만져본 적도 있었다. 촉감이 탱탱볼이나 젤 마우스 패드 같았다.

"맞아요. 하지만 남자분들의 대흉근 확대술에 사용되기도 하죠."

"대흉근 확대술이요?"

"네, 코히시브 겔은 전 세계적으로 안전성이 널리 입증됐고, 실리콘보다 안전하면서 식염수보다 촉감이 훨씬 자연스럽죠. 팩 모양만 좀 달리 해서 남자분들 가슴 근육 보강용으로 작년 말 새로 출시됐어요. 미국과 브라질에서는 이미 대중화되는 단계구요, 저희 원장님이 한국엔 최초로 도입하셔서 요즘 강남을 중심으로 알음알음들 많이 찾아주시고 계세요."

"별 게 다 있군." 무심히 말했지만 내심 강남에서 많이 온다는 말에 혹한 그의 앞에, 박신영이 책상에 놓여있던 클리어파일을 활짝 펼쳤다. 비포 사진들은 다 말라비틀어진 멸치인데 애프터 사진들의 가슴 근육들은 자신보다 우월해, 그는 이틀에 한 번씩 이를 악물며 바벨을 들어 올리는 자신의 노력이 허탈해졌다.

"음, 이쪽도 안전이 보장된 건가요? 남자 가슴 확대술은 금시초문이라."

"원리는 유방 확대술과 같은데 오히려 출산과 수유를 겪는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안정적이죠. 남성의 경우 보형물 생착도가 더욱 높고, 구축이 생길 위험은 낮고요."

"여자분 눈으로 볼 때 제 가슴이 좀 빈약해 보이나요? 솔직히." 그는 박신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건배, 를 속으로 읊으며. 상담실장은 여느 여자들처럼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솔직히 키에 비해 흉곽이 살짝 빈약하신 게 옥에 티라면 티겠죠. 지금도 너무 완벽하시지만요."

박신영은 문자로 말했다. 곧 학생과 직장인이 몰리는 방학 및 휴가 시즌은 성수기라 수술비가 10% 오르는데, 이번 주 내로 예약하면 오르기 전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그는 친절한 상담에 감사했으며, 이 번호가 실장님의 개인 핸드폰 번호냐고 답문을 보냈다.

"연예계 진출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병아리 같은 신입 셋이 새된 오마담의 목소리를 듣고 흥미로운 시선들을 던졌다. "목소리 낮춰." 그는 오마담을 툭 쳤다.

"연희년 때문에? 열녀, 아 열부 났다."

"투자지."

"그런 여자들, 남자가 허수아비 같이 구는 건 또 별로일 듯해 할 걸. 나도 예전에 다 맞춰줬다가 돈만 쓰고 차였잖아."

"딴 년 낚음 돼." 그는 거울 앞에서 간단한 메이크업을 마쳤다. 오마담이 애먼 보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비주얼이 겸손하면 몸놀림이라도 훈훈해라. 선수 형님들이 누님들한테 혀 쓰는 모양으로 꼼꼼히 닦아." 보이들은 호스트가 되고 싶어 찾아왔지만 외모가 한끝 부족해 잡일을 하는 애들이다.

가게 복도를 걸으면, 두꺼운 카펫 때문에 늘 까마득한 지하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는 방에서 가장 부유한 아줌마에게 열과 성을 다한 결과 2차를 성사시켰다. 아, 기 빨려. 모텔 입구에서 침을 탁 뱉은 그는 젖은 걸레가 된 기분이었다. 수술비와 일을 나가지 못하는 회복 기간에 들 생활비를 생각하면 허리가 부서지게 일해야 했다.

사흘 뒤, 그는 명동의 한 호텔에서 박신영과 시간을 보낸 결과 추가 디스카운트를 얻어냈다.

"알겠어. 병원엔 내가 잘 말할게."

"넌 이제껏 내가 본 여자 중 제일 예뻐. 진심이야." 박신영의 가슴이 감격해하는 척하는 그의 입술을 탄력 있게 튕겨냈다.

호텔 문을 나서던 그는, 순간 이마 한가운데를 망치로 맞은 듯한 어찔함을 느끼며 발을 헛디뎠다.

"괜찮아? 수술 전엔 컨디션 조절 잘 해야 해."

"아, 요 며칠 과로해서 그래. 증권 쪽이 워낙 야근이 많잖아." 박신영의 걱정스런 눈길을 뒤로 하고, 그는 택시 뒷좌석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수술 전까지 열심히 출근 찍어야 하는데 걱정이었다.

그는 무남독녀인 연희의 부친이 조만간 국내 유수의 의류 업체를 인수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의류 쪽은 문외한이고 사업체를 물려 줄 아들이 없어, 연희를 외국 의상 학교에 유학을 보냈다고 했다. 그들은 경영 쪽으로 믿을 만한 남자 실무자가 필요했다. 그는 학교 때 나름 열심히 했던 경영학 전공 책들을 떠올리며, 연희에겐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세부에 간다고 말해둔 회복기 동안 부지런히 읽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사, 간호사, 박신영이 관 속에 들어간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수술포 아래로 박신영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가능한 부작용은 근육 박리로 인한 과다출혈,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경련, 국소 감각 상실, 동의서에 사인하셨듯이 전신마취 과정에서의 심장마비입니다. 하지만 혈액검사와 심전도 테스트 결과 아무 문제없으신 걸로 나왔으니, 그냥 푹 주무셨다 일어나세요." 대답하기도 전 입에 마취 마스크가 씌워졌다. 코뚜레 걸린 소가 된 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불덩이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진땀을 흘리며 돌아본 그의 입에 불덩이가 단숨에 흘러들어와,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용암 같은 뜨거움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위장이 불탔다. 꺽꺽거리는 그의 뺨을 누군가 후려쳐, 눈물 맺힌 눈을 겨우 뜨니 앳된 간호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박 붕대 때문인지 턱뼈가 부서질 것 같고, 졸아든 목구멍에선 피맛이 느껴졌다. 온몸이 절로 덜덜 떨리면서 심한 구역질이 일었다.

"마취 깨시면서 좀 춥고 역하실 거예요. 그래도 토하심 안 돼요. 힘들어도 참으세요."

"무, 물…."

"앞으로 다섯 시간은 물 드시면 안 돼요.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간호사는 물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적셔주고, 높이 매달린 플라스틱 원통 같은 것을 체크한 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침대 옆의 벨을 누르라고 하곤 나갔다. 무통주사약이 얼른 다 들어오길 바라면서, 그는 온몸을 떨며 개처럼 끙끙 앓았다. 방광에 압박이 느껴져 손을 침대 밖으로 뻗던 그는 비명을 질렀다. 턱에서 따닥, 불꽃이 이는 듯했다. 절개한 입 속에 고인 피를 빼 내는 피통의 고무호스가 눌린 거였다.

그는 흉근 확대술, 사각턱 절제, 이마 보형물 삽입, 코 높임술을 한꺼번에 받았다. 어차피 고생할 것, 한 큐에 끝내기로 했다. 코히시브 겔과 U자형 고어텍스 보형물, 귓바퀴 뼈와 녹는 실이란 이물질들이 그의 몸속에서 원래 조직에 미끈하게 달라붙기 위해 끊임없이 주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진통제를 계속 투여해도, 가슴과 앞턱이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 주기적으로 덮쳐왔다. 살짝 열린 화장실 문 밖에 링겔대를 잡고 선 간호사를 세워둔 채, 5분에 걸쳐 소변을 보던 그의 머리에 가족이 떠올랐다. 벽돌을 쌓아올린 지게를 지고 달팽이관 같은 좁은 가건물을 오르던 아버지와, 늘 허리가 아프다면서 구부정히 숙인 자세로 마트 바닥을 대걸레로 미는 어머니가. 오랜 시간 소변을 참은 요도가 아파 그는 좀 울었다.

인간의 회복력은 대단해, 입원 첫날 밤새 신음하던 그는 마지막 날엔 집에 가고파 몸이 근질거렸다. 방탄조끼 같은 가슴 보호대 탓에 입원할 때 걸치고 온 점퍼가 붕 떴다. 버스에 얼굴을 정통으로 들이받힌 환자 같은 몰골이었지만, 헥사메딘으로 양치를 하고 터진 입꼬리에 글리세린을 바르니 개운했다. 전날 밤 조용히 그의 병실을 찾았던 박신영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그는 피와 침과 소독약이 섞여 악취가 나는 붕대를 풀고, 여기저기 붙은 반창고를 재빠르게 떼어주는 간호사들의 손길에 정신없었다.

"얼마쯤 지나야 사람 같을까요?"

"한 달은 느긋이 기다리세요." 병원의 서비스인 리무진 택시에 올라탄 그는, 백미러 속 자신을 보곤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차량 안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시킨 그는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오마담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었다.

어제부터 출근한 애. 와꾸 상타침

그는 입을 쩍 벌리다 통증에 억, 하며 입을 닫았다. 분명 연희와 카페에 있을 때 유리창 밖으로 본, 연희가 '갖고 싶다'고 한 그 남자애였다. 출국한 연희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는 역삼동의 좁은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출혈에 시달린 그의 의식에 아롱졌다.

그는 완벽한 신랑이었다. 결혼식은 좀 특이해, 연희는 거대한 성냥 탑 안에서 베일을 쓰고 기어 나왔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베일을 벗기자, 실리콘이 코끝을 뚫고 나온 박신영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애교스런 누런 덧니를 보이며 웃으면서 그의 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지금도 너무 완벽하신데, 옥에 티예요. 이마가, 코가, 턱이, 가슴이, 피부가,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깨어난 그는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나란히 입국장에 선 몇몇 여자들이 그를 곁눈질했다. 그래, 마음껏들 봐. 아까 거울로 확인한 그의 모습은 자신이 봐도 아그리파 같았다. 그는 여자들을 외면하고, 코트 주머니 속을 더듬어 까르띠에 상자를 확인했다. 그건 단순한 반지가 아니었다.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자, 새 삶을 열어줄 마법 열쇠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머리를 한번 흔들고, 꽃다발을 고쳐 쥐었다. 손에 밴 땀에 꽃을 싼 셀로판지가 바삭거렸다. 그때 카트를 밀고 나오는 연희를 보았다.

그는 손부터 번쩍 들었다. 아직 뻐근한 가슴 통증을 참으며 열심히 손을 흔드니, 연희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황급히 걸어 나가는데, 환히 웃던 연희가 카트를 옆으로 꺾었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후리후리한 남자가 연희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남자의 실루엣이 왠지 낯익은 것 같았다. 허겁지겁 그들을 쫓아간 그는 간신히 연희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어머, 뭐야?"

짝! 뺨에 얼얼한 통증이 일고, 눈앞이 순간 까맣게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그의 뇌리엔 황망함보다 턱뼈에서 박리된 근육이 아직 완전히 안 붙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똑같은 선글라스 너머로, 연희와 키 큰 남자는 뺨을 감싸 쥔 그를 구제 불능의 치한처럼 쳐다봤다.

"동민씨?" 연희가 경악했다.

"아는 사람?" 연희 옆의 남자가 무심히 물었다.

"너는?"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연희 옆에 선 남자는 분명 그때 그 카페 유리 밖에 있던 놈, 오마담이 반색하던 그의 직장 동료이기도 한 녀석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부 밑 실리콘 보형물들이 열기를 내며 주인을 피날레로 몰고 갔다. 고통 없인 성취도 없다. 마지막에 와 모든 걸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연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까르띠에 상자를 내밀었다.

"설마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 대박이다."

"넌 빠져." 그가 남자에게 일갈했다.

"근데 우리 주제를 알아야죠, 선배님." "동민씨, 결혼하면 일 나가기 힘들지 않겠어?"

연희와 남자의 비아냥을 듣고,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야, 니가 옆에 낀 이 자식도 똑같이 몸 파는 놈이야. 아직 붓기가 다 안 빠져 그렇지, 두 달만 지나면 이 새끼보다 내가 훨씬 나을 거라니까? 어차피 싸구려들이랑 놀 바엔 너한테 더 정성들이는 싸구려를 택해. 성의는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얘는 못 오를 나무는 안 쳐다봐 좋아."

"못 오를 나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연희를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는 연희의 얼굴은 정말 드높은 탑처럼 멀고 고고했다.

"가게에서랑 연희씨한테 형 얘긴 대충 들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인상적이다. 참고할게요, 그 자세는."

"됐고, 가자, 내 마르티즈. 아, 동민씨. 호박즙 많이 먹어. 안 먹는 것보단 나을 거야."

연희와 남자가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몇몇 사람들이 흘끗 보았다.

그는 공항 출구로 걸어 나가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정말로,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실제로 산소가 몸에 안 들어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붓기가 가라앉으면 재수술 받을 병원을 알아봐야겠다, 생각했다. '바비'의 남자친구 '켄'처럼, 외모뿐 아니라 늘 구김 없는 미소를 짓는 귀족적인 아이덴티티까지 실리콘과 코히시브 젤처럼 이식해 주는 병원을.

휘청거리는 그의 앞을 추월한 사람들이 택시를 가로채 빠르게 달아났다. 붓기와 흉살을 낱낱이 드러내는 밝은 햇빛 속, 온몸이 붕 뜨듯 어지러웠다. 큰 수술 시 과다 출혈로 인한 후유증 중 하나, 일시적 빈혈일 거라 생각하며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