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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영화평론가
사각의 캔버스 안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있다. 동그라미는 미로다. 위쪽과 아래쪽에 각기 동그라미 안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

그 사이를 열리고 닫힌 길들이 어지럽게 가득하다. 그녀는 닫힌 길들을 찾아 연필로 검게 칠한다. 검은 길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하나의 길만 남는다. 그녀가 출구를 찾는 방법이며, 목표를 향해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발광하는 현대사'의 홍덕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성인용 애니메이션 '졸업반'은 사각의 틀에 갇힌 동그란 미로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이라는 캔버스 안에서 목표를 위해, 혹은 사랑을 위해 각자 자신만의 미로 속에서 헉헉대는 청춘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동그라미와 삼각형으로 표상되는 마음 맞추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무엇이 됐든 간에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무척 힘겹다.

작품이 저급해서가 아니다. 각본은 탄력 있고 균형이 잡혀 있다. 연출의 시선은 깊고 작화는 매끄럽다. 다만 '졸업반'이 우리 내면의 어떤 취약한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고급 술집에 나가는 여대생이라는, 불편하지만 새롭지 않은 소재가 그녀를 짝사랑하는 만화적 상상력과 만나는 순간 파열이 시작된다. 질투는 단지 화장을 지우는 비누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함이 지워지자 욕망이 드러나고, 선량함이 걷히자 위선이 나타난다.

의지는 부도덕하고 배려는 거래에 불과하다. 사랑은 은폐된 욕망이고 믿음은 배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게 우리의 민낯이다. 모두가 각자의 막힌 길들을 지워나갈 뿐이다. '졸업반'은 그렇게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이라는 이분법의 선 바깥으로 공을 던져 버린다.

그리스 신화의 다이달로스는 괴수 미노타우루스를 가두기 위해 미로를 만들지만 자신이 갇히고, 이카루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미로를 탈출하지만 태양에 너무 가까이 올라간 탓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고 만다. 아리아드네는 괴수를 물리치러 가는 테세우스를 위해 실타래를 준비해 주지만 배신당한다.

'졸업반'은 연상호 감독의 절망적 세계관과 성을 매개로 관계의 맥락을 탐색해온 홍덕표 감독의 풍자가 만들어낸 미로가 얼음처럼 차갑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