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지 전경_2
1998년부터 12차례에 걸쳐 발굴 된 회암사지 전경. 양주시는 고려말~조선초기 최대사찰이던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는 회암사지 항공사진. /양주시 제공

12세기 이미 존재 1376년 대대 중창
32만㎡ 규모 조선 초기 왕궁 판박이
동아시아 '불교 교류사' 중요 유적지
양주시, 올해말 잠정목록 신청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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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화려하고 장엄하기가 동방에서 최고다."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은 회암사를 이처럼 예찬했다. 아쉽게도 회암사는 현존하지 않지만, 절터와 유물이 '회암사지(양주시 회암동 산14)'에 남아 그 웅장함을 전하고 있다. 회암사지는 면적만 해도 32만3천㎡에 달한다 .

사찰이 있던 터라기보다 왕궁에 가깝다. 회암사지의 외관은 조선 초기 왕궁을 빼닮아 '제2의 왕실'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 날 회암사지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이란 견해다.

12세기 무렵 동아시아 불교 교류사를 생생히 알 수 있는 각종 유물과 세계에서 가장 큰 온돌 유적, 궁궐과 사찰이 합쳐진 건축 구조 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문화재청을 비롯해 국내외 전문가들의 이러한 평가에 힘입어 현재 회암사지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쌍사자석등_보물 제388,389호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쌍사자석등 보물 제388,389호.

■동아시아 불교 교류사 품은 세계적 유산

회암사는 고려~조선을 잇는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교류사를 확인하는 중요한 유적지다. 회암사가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배경은 고려말 ~ 조선 초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뤄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는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회암사 창건의 시초는 고려말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선사 때로 알려져 있다. 지공선사는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현재 인도)의 나란타사원과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 했고, 지공선사의 제자인 나옹이 그 수기에 따라 우왕 2년(1376년)에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회암사의 주지로 머무르면서 왕실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무학대사 등 회암사를 지키고 키운 스승들을 기리는 부도와 탑, 비, 석등이 과거 회암사의 위엄과 동아시아 불교 교류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회암사지 박물관 (5)
회암사지박물관.

■기록으로 본 회암사의 '번영과 몰락'

회암사의 존재는 다양한 역사기록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1404년 간행된 '목은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는 회암사의 건물구조와 배치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회암사는 262칸의 사찰로 지어졌다.

창건 시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1174년(고려 명종 4년)에 금나라 사신이 다녀갔다는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통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회암사는 태조가 아들인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무를 만큼 조선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하고 궁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해 150명을 보내 부역을 살게 했다'는 '태종실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이 불교 재흥정책을 펼치면서 조선 초기 최대 사찰의 면모를 갖췄다.

김수온의 '회암사중창기'에는 성종 3년(1472년)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유교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면서 회암사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명종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 21년)", '선조실록'에는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 28년)"는 기록이 있다. 결국 회암사는 16세기 후반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800년 후 다시 드러난 위용

새형잡상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회암사지는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1960년대 사적 128호로 지정되면서 조사가 몇 차례 있었으나 충분하지 못했고, 개발논리에 밀려 발굴은 뒷전으로 밀렸다. 1997년 경기도 박물관의 시굴조사를 통해 회암사의 규모와 가람배치를 알 수 있게 되면서 이듬해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된다.

1998년부터 2015년까지 1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일반적인 사찰건축과는 달리 궁궐건축의 건물구조나 방식이 나타난다. 보광전 터에서 발견된 금탁(사진3)은 왕실 사찰의 위상을 증명한다. 금탁 표면에는 '왕사묘엄존자 무학', '조선국왕' 등이 새겨져 왕실 발원 물품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청기와도 왕실과의 관련성을 입증한다. 청기와는 재료조달이 어렵고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어 궁에서도 흔히 사용하지 못한 물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근정전과 사정전에만 덮었을 뿐 문소전과 종묘에도 덮지 못했다.

청동금탁
이외에도 궁궐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용두, 토수, 잡상, 용무늬기와, 봉황무늬기와 등 기와류나 왕실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백자가 다량 출토됐다. 특히 잡상(사진1)은 무장형, 동물 모습의 반인반수, 말과 새 등 동물형 같은 다양한 모양이 확인됐다.

국내 고궁의 잡상보다 시기를 앞서는 조선 초기의 유일한 잡상이다. 이들 유물은 조선전기 왕실과 불교문화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와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온돌시설이다. 우리나라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인 온돌시설이 국내 최대 규모로 확인됐을 뿐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탁상 온돌도 발견돼 특수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향한 발걸음

금동불상
양주시는 올해 말 국가사적 제128호로 지정된 회암사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사전 절차로 문화재청에 잠정목록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오는 2월부터 10개월간 등재가치 발굴 학술용역을 실시하고, 10월에는 기초연구와 분석을 통한 학술대회도 계획 중이다.

잠재목록 등재가 완료되면, 회암사지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절차를 밟게 된다. 등재가 되면 회암사지는 대한민국의 유산을 떠나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중요산 유산임을 전세계적으로 증명하게 된다. 등재까지는 총 5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시는 회암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지역을 찾는 관광객 수를 평균 50% 이상 늘려 지역경제활성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정부로부터 보존관리 예산(70%)까지 지원받을 수 있어 관광도시로서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시 관계자는 "회암사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진정성과 완전성, 특수성 등이 충분한 역사·문화적 자원"이라며 "이는 시민의 자긍심 고취는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양주/최재훈·김연태기자 kyt@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