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이 사실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책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거죠."
22일 세상을 떠난 고(故) 박맹호 민음사 출판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출판계의 '영원한 현역'이자 '살아있는 역사'로 불렸던 출판계 거목이었다.
고인이 1966년 서울 청진동의 옥탑방에서 시작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낸 민음사의 역사는 우리 출판의 성장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단편 소설을 출간한 문학청년이기도 했던 고인은 우리 출판계에 서울대 불문과 재학 시절 일본 서적, 그것도 해적판밖에 없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출판에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1966년 서울 광화문에서 처남이 운영하는 전화상을 사무실로 활용하고 편집과 교열은 출판사의 등록 주소인 노량진의 집에서 하며 펴낸 첫 책은 인도 요가책의 일본어판인 '요가'였다.
신구문화사 주간이던 신동문씨가 '동방구'(東方龜)'라는 필명으로 옮긴 이 책은 우리나라에 요가를 수입하던 계기가 되면서 당시 1만5천권이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인은 이후 무엇보다 일본서 번역과 전집물 방문판매 일색이었던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단행본 기획과 신진 작가 발굴 등 늘 '반 발짝 앞서가는' 새로운 시도로 출판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앞장서왔다.
민음사 창립 30주년을 맞아 1995년부터 기획됐던 '세계문학전집'이 대표적이다.
국내 최초로 외국 작가들과 정식 계약을 맺고 국내 정상급 번역자들을 섭외해 만들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은 영미와 서유럽 중심이었던 기존 문학 전집과는 달리 제3세계 작가, 그리고 여성작가까지 다양한 작가를 소개했다. 1998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시작으로 1월 현재 346권까지 나와 있다.
고인은 생전 "세계문학전집을 시작할 때는 100권 정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욕심으로는 1천 권까지 하고 싶다"면서 "세계 문학을 한국에서 모두 수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의욕을 보였다.
"우리 작가들이 세계문학전집 반열에 드는 날을 꿈꿨다"는 고인은 문학출판에 특히 애착을 보였다.
1970년대 외국 작품 위주이거나 김동리 황순원 같은 대가들의 작품만 출간되던 문학계에서 국내 신진 작가 발굴에 관심을 돌린 것도 고인이었다.
1974년 시작한 '오늘의 작가 총서'를 통해 최인훈의 '광장',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1976년 문학 계간지 '세계의 문학' 창간과 함께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은 당시 신인 작가의 산실로 통했다. 이문열, 한수산, 조성기, 최승호, 강석경 등 오늘날 우리 문학의 중심인물들이 이 상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김수영 문학상' 역시 시인들의 창작 활동을 고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김광규,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비인기 장르였던 시(詩)의 대중화에 앞장선 것도 늘 '반발짝 앞서가는' 시도 중 하나였다.
1972년 '당시선'(고은 옮김),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김현 옮김) 등으로 시작한 '세계시인선'은 일본어 중역이 난무하던 기존 출판 관행을 대신 원문번역을 시도하고 최초로 가로쓰기를 했다.
이어 1974년 시작된 '오늘의 시인' 총서는 김수영, 김춘수, 고은, 박재삼, 황동규 등을 소개했고 다른 문학출판사의 비슷한 시집 시리즈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국판 30절의 시집 판형 역시 '오늘의 시인'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다.
고인은 2009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출판 시장에서 팔리는 책은 외판 전집류와 대중 소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그대로는 창조적 출판이 어렵다고 생각해 시집을 비롯한 본격문학 작품을 내기 시작했다"며 민음사가 창작 단행본 시장의 깃발을 올린 데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학 뿐 인문·사회과학 등 학술 출판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83년부터 16년까지 발간된 '대우학술총서'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까지 424권을 출간했다. 1977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발간한 '이데아 총서'를 통해서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미메시스' 등을 국내에 소개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변방에 있던 공상과학(SF)과 판타지 문학 등 장르문학에도 관심을 쏟았다.
자회사 '황금가지' 브랜드를 통해 '이갈리아의 딸들'로 시작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등을 펴냈고 '밀리언셀러 클럽', '환상문학 전집'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고인은 2005년 민음사 대표직을 내놓고 회장을 맡으며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원한 출판 현역'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왔다.
출판계의 쇠락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책은 인간의 DNA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며 출판의 앞날을 낙관했다.
"내가 출판을 시작할 때에도 아날로그 인쇄는 위기라고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잖습니까. 컴퓨터로 본 것은 쉽게 잊어도 종이로 본 것은 머리에 입력이 더 잘되거든요."(2009년 연합뉴스 인터뷰 중)
"그저 반 발짝 앞서간다'고 강조했던 그의 뜻은 이제 큰딸 박상희 비룡소 대표 등 2세들이 이어받아 이루게 됐다. /연합뉴스
22일 세상을 떠난 고(故) 박맹호 민음사 출판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출판계의 '영원한 현역'이자 '살아있는 역사'로 불렸던 출판계 거목이었다.
고인이 1966년 서울 청진동의 옥탑방에서 시작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낸 민음사의 역사는 우리 출판의 성장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단편 소설을 출간한 문학청년이기도 했던 고인은 우리 출판계에 서울대 불문과 재학 시절 일본 서적, 그것도 해적판밖에 없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출판에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1966년 서울 광화문에서 처남이 운영하는 전화상을 사무실로 활용하고 편집과 교열은 출판사의 등록 주소인 노량진의 집에서 하며 펴낸 첫 책은 인도 요가책의 일본어판인 '요가'였다.
신구문화사 주간이던 신동문씨가 '동방구'(東方龜)'라는 필명으로 옮긴 이 책은 우리나라에 요가를 수입하던 계기가 되면서 당시 1만5천권이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인은 이후 무엇보다 일본서 번역과 전집물 방문판매 일색이었던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단행본 기획과 신진 작가 발굴 등 늘 '반 발짝 앞서가는' 새로운 시도로 출판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앞장서왔다.
민음사 창립 30주년을 맞아 1995년부터 기획됐던 '세계문학전집'이 대표적이다.
국내 최초로 외국 작가들과 정식 계약을 맺고 국내 정상급 번역자들을 섭외해 만들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은 영미와 서유럽 중심이었던 기존 문학 전집과는 달리 제3세계 작가, 그리고 여성작가까지 다양한 작가를 소개했다. 1998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시작으로 1월 현재 346권까지 나와 있다.
고인은 생전 "세계문학전집을 시작할 때는 100권 정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욕심으로는 1천 권까지 하고 싶다"면서 "세계 문학을 한국에서 모두 수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의욕을 보였다.
"우리 작가들이 세계문학전집 반열에 드는 날을 꿈꿨다"는 고인은 문학출판에 특히 애착을 보였다.
1970년대 외국 작품 위주이거나 김동리 황순원 같은 대가들의 작품만 출간되던 문학계에서 국내 신진 작가 발굴에 관심을 돌린 것도 고인이었다.
1974년 시작한 '오늘의 작가 총서'를 통해 최인훈의 '광장',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1976년 문학 계간지 '세계의 문학' 창간과 함께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은 당시 신인 작가의 산실로 통했다. 이문열, 한수산, 조성기, 최승호, 강석경 등 오늘날 우리 문학의 중심인물들이 이 상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김수영 문학상' 역시 시인들의 창작 활동을 고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김광규,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비인기 장르였던 시(詩)의 대중화에 앞장선 것도 늘 '반발짝 앞서가는' 시도 중 하나였다.
1972년 '당시선'(고은 옮김),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김현 옮김) 등으로 시작한 '세계시인선'은 일본어 중역이 난무하던 기존 출판 관행을 대신 원문번역을 시도하고 최초로 가로쓰기를 했다.
이어 1974년 시작된 '오늘의 시인' 총서는 김수영, 김춘수, 고은, 박재삼, 황동규 등을 소개했고 다른 문학출판사의 비슷한 시집 시리즈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국판 30절의 시집 판형 역시 '오늘의 시인'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다.
고인은 2009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출판 시장에서 팔리는 책은 외판 전집류와 대중 소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그대로는 창조적 출판이 어렵다고 생각해 시집을 비롯한 본격문학 작품을 내기 시작했다"며 민음사가 창작 단행본 시장의 깃발을 올린 데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학 뿐 인문·사회과학 등 학술 출판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83년부터 16년까지 발간된 '대우학술총서'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까지 424권을 출간했다. 1977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발간한 '이데아 총서'를 통해서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미메시스' 등을 국내에 소개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변방에 있던 공상과학(SF)과 판타지 문학 등 장르문학에도 관심을 쏟았다.
자회사 '황금가지' 브랜드를 통해 '이갈리아의 딸들'로 시작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등을 펴냈고 '밀리언셀러 클럽', '환상문학 전집'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고인은 2005년 민음사 대표직을 내놓고 회장을 맡으며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원한 출판 현역'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왔다.
출판계의 쇠락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책은 인간의 DNA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며 출판의 앞날을 낙관했다.
"내가 출판을 시작할 때에도 아날로그 인쇄는 위기라고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잖습니까. 컴퓨터로 본 것은 쉽게 잊어도 종이로 본 것은 머리에 입력이 더 잘되거든요."(2009년 연합뉴스 인터뷰 중)
"그저 반 발짝 앞서간다'고 강조했던 그의 뜻은 이제 큰딸 박상희 비룡소 대표 등 2세들이 이어받아 이루게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