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살 청춘 반 강제로 인민군 지원
부대해체 후 미군에 잡혀 포로 신세
"굶주림과 갈증 오죽하면 핏물 마셔"
평양형무소 '화재'후 인천에 끌려와
부산·거제 옮겨 다니다 수용소 탈출
우연찮게 민의원 김정실 집에 '피신'
"친부모보다 잘해준 분들 잊지 못해"
육군에 자진 입대… 이때 인천 배치
전기통신회사까지 세우고 자리 잡아

1929년 평안북도 서북부지역 용천(龍川)군에서 태어난 이형근(88)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동원됐다가 미군 흑인 병사에게 잡혀 포로가 됐다. 평양, 인천, 거제도,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거쳐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할아버지는 풍파를 만난 배처럼 이리저리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반도 서북단인 고향 용천에서 부산까지 너무 먼 길을 왔다. 전쟁이 멈췄을 때 그에게 남은 건 몸뚱이뿐이었다. 아니,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천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갈 곳 없는 이형근 할아버지는 호구지책 삼아 육군에 자진 입대했고, 인천항이 보이는 육군 병참기지창에 배치됐다.
인천은 그렇게 제2의 고향이 됐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동네에 산다. 동인천역 앞에서 전기상회를 운영하고, 통신 관련 사업도 하면서 4명의 딸을 키웠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 이형근 할아버지는 평북 용천 고향에 있었다. 20살이었다. "그날 비가 왔어. 전쟁이 난 거야. 그때까지도 인민군에 안 나갔어. (남북이)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할 때인가? 병력이 부족하니까 인민위원장이 '이형근 동무는 왜 인민군에 안 가는 거야'라고 독촉하더라고."
할아버지는 그해 8월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지원했다. 아버지는 동족끼리 싸우는 전쟁에 자식을 내보낼 수 없다며 아들의 인민군 입대를 반대했었다. 하지만 나 혼자 살겠다고 마냥 도망 다닐 수만은 없었다.
"인민군이 총을 메고 나를 잡으러 다니는 거야. 말이 자율적 지원병이지 강제 동원이나 다름없어. 우리 가족을 너무 못살게 구니까 어느 날 아버지가 나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어."
이형근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포병이 됐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보병이 돼 3일간 총 쏘는 방법만 배운 뒤 전쟁터에 나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신의주에 있는 부대에서 76㎜ 포를 담당했는데, 중졸이라고 금방 부분대장도 달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할아버지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심지어 총을 쏴 본 적도 없다.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벌일 때까지 거리 측정법만 배웠다.
UN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이어 10월 9일 평양까지 탈환하자, 할아버지가 있던 부대는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다 결국 해체됐다. 그의 머릿속엔 고향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황해도 신계군 한 산골짜기 마을에서 사복을 빌려 입고서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평양 인근에서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깜둥이가 트럭을 갑자기 세워. 나를 불러 세우더니 모자를 벗기는 거야. 머리가 짧으니까 트럭에 올라타래."
당시 미군은 누가 북한군이고 한국군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저 똑같은 동양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짧은지 긴지를 보고 인민군 여부를 파악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제3대대 제10중대 제2소대 임경섭(3등병조) 분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을 구분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사투리' '얼굴빛' '머리카락 길이'다. 그는 "사투리, 구릿빛 얼굴, 짧은 두발에 의해서 적의 무리들은 쉽사리 구분됐다"고 했다.

이형근 할아버지와 동향(同鄕)인 백세룡 할아버지도 인민군으로 있다가 포로 생활을 했다. 백세룡 할아버지는 '인천 이북도민 발자취 망향 60년史'에 쓴 글에서 "남신의주 상업학교에서 8월 7일부터 약 12일간 기초훈련을 받은 후 대구의 팔공산 전장에 배치됐다"며 "우리 신병에겐 총이 지급되지 않고 수류탄만 두 발씩 줬다"고 했다.
또 "(포로 석방 이후) 1·4 후퇴 때 국군을 따라 남하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며 "아버님은 생전에 어머니와 동생을 고향에서 못 데리고 온 자책으로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했다. 백세룡 할아버지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재작년 생을 마감했다. 이형근 할아버지보다 세 살 아래인 그는 인천에서 목재회사를 다니고 양돈사업을 했다고 한다.
이형근 할아버지가 처음 수감된 곳은 평양형무소다. 이곳에 갇힌 지 3일 만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포로가 죽었다.
"밤 10시쯤인가, 갑자기 '불이야! 불이야!' 하는 거야. 엄청 죽었어. 포로 놈들 중에 몰래 담배를 가지고 있는 놈이 있었던 거 같아."
반공포로 출신 김태일 씨가 쓴 '거제도 포로수용소 秘史(비사)'에도 평양형무소 화재 사건이 나온다. '어느 날, 우리들을 내일 더욱 남쪽으로 이동시킨다는 통보가 왔다. 그런데 그날 밤 공교롭게도 형무소에 화재가 발생했다.
자물쇠가 잠긴 감방 속에 갇혀있던 많은 포로가 불에 타 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김태일 씨는 중공군 개입으로 UN군과 한국군의 후퇴가 임박하자 포로 후송이 귀찮아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형근 할아버지의 기억이 좀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미8군 기록에는 1950년 11월 5일 포로 1명이 담배를 태우다 불이 발생해 포로 46명이 숨진 것으로 돼 있다.
포로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가장 큰 고통은 갈증이었다. 오죽하면 핏물까지 마셨을까. 형무소 건물 사이마다 해자처럼 물길을 만들었는데, 인민군들은 그곳에 시체를 던져 넣었다.
"인민군 아이들이 후퇴하면서 반동분자를 다 쏴 죽이고 갔어. 거기에 처넣어서 물보다 사람이 더 올라와 있었지. 손바닥으로 시체를 밀어젖히고 엎드려서 핏물을 마셨어.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 형무소 안에 물이 있을 수가 없잖아. 미군이 탱크로리로 대동강에서 물을 퍼 오는데, 그것으론 밥하기도 모자라."

평양형무소가 불에 타자 그는 평양의 한 방직공장에 며칠 머물다 기차에 실려 인천으로 왔다. 흥남철수작전(12월 15~23일) 직후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항 인근 기차역에 내려 걸어서 인천소년형무소까지 끌려갔다. 지금 남구 학익동에 있는 인천구치소 자리다. 1938년 3월 문을 연 인천소년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로수용소로 쓰였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포로를 얼마나 잡아다 놨는지 주변이 다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야전용 천막이었다"며 "거기서 며칠을 지내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 포로가 크게 늘었다. UN군의 수용소 포로 통계 자료에 따르면 그해 9월 1만819명이던 인민군 포로는 10월 6만2천678명, 11월 9만8천143명 등 큰 폭으로 증가했다.
조성훈이 쓴 '한국전쟁과 포로'를 보면 인천소년형무소는 2천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로 수가 크게 늘어 2개 동이 더 건설됐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부산 서면수용소를 거쳐 거제도 수용소에 수감됐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 대립이 심화하자, 반공포로들은 부산 가야수용소, 인천 부평수용소 등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는 가야 수용소에 갇혀있다가 1958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 때 수용소를 나와 도망쳤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인천 부평포로수용소는 이튿날에나 포로들의 탈출이 이뤄졌는데, 육군본부의 '6·25사변 후방전사' 자료에 따르면 미군이 경비를 강화한 탓에 42명이 숨지고 6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9명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다.
수용소를 벗어난 이형근 할아버지는 잡히지 않기 위해 사람이 많은 부산 시내로 뛰어들어갔다. 무조건 큰 집만 찾아다녔다고 한다.
"일본식 집인데 엄청 큰 집이야. 새벽 4~5시쯤 됐나? 문을 발로 차니까 할머니가 나왔어. 사연을 얘기하니까 들어오라고 하더라구."
이형근 할아버지가 피신한 곳은 1950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남 고성군 지역에서 당선된 김정실(1904~1969)의 집이다.
할아버지는 기자의 수첩에 '아버님 金正實 의원, 어머니 金禹安(김우안)'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 집 신세를 잊지 못해. 고향에 계신 친부모보다도 나에게 잘해 줬어"라고 했다. 순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던 할아버지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김정실 의원 집에서 몇 개월 지내다 군에 자진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은 뒤 부대 배치를 받은 곳이 바로 인천이다. 그는 인천항 근처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유류를 중부전선 부대에 보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제대 후에는 동인천역 앞 무허가 하꼬방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전기통신 회사까지 차렸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통일안보중앙협의회 인천시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 대부분이 반공포로 출신이다. 원래 감투 쓰는 것을 싫어하는데, 최고령자라서 회장을 맡게 됐다고 한다. "다 죽었어. 내가 제일 고령자야. 인천만 정회원이 500명 가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몇 명 남았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아."
이형근 할아버지는 "모임에는 30명 정도 나오는데 그중 절반은 마누라들"이라며 "우리 회원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고 그 빈자리를 부인들이 채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