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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한 할아버지가 쌀 두 가마를 실은 자전거를 끌고 소래철교를 건넜을 당시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현 소래철교 위에서 자전거를 끄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촬영한 뒤 배경으로 옛 소래철교를 그려 넣었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원주민에 밀린 피란민 1960년대 황량한 소래포구 정착 '실향민촌'이라 봐도 무방
시흥 등 곡창지대서 나룻배 대신 철길위 자전거로 품질 좋은 쌀 실어다가 되팔아
외상으로 가져가는 탓에 큰 돈 못벌어 "밀린 외상값은 받고 떠난다" 오기로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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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한(81) 할아버지가 노렴나루라 불리던 지금의 소래포구에 정착한 1960년대 중반 이 일대에는 10여 명이 사는 판잣집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한적하기 그지없는 갯가일 뿐이었다. 그런 소래포구가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수도권 최대 관광지 중 한 곳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고구한 할아버지와 같은 실향민이 있었다.

실향민들이 노렴나루에 자리를 잡고 어업을 시작하면서 시끌벅적한 소래포구는 태동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펴낸 '인천연안의 어업과 염업'이란 책에는 "1963년 당시 실향민 6가구 17명이 전마선, 범선(무동력선) 등으로 연안에서 새우잡이를 시작했다"고 당시 노렴나루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흥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시흥시사'도 "소래어촌은 이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의 해안정착촌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소래포구는 '실향민촌'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실향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도 소래포구 어시장에서는 '황해도 옹진상회', '연백상회', '개성상회' 등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인천 중구, 동구 등지의 해안가에 터를 잡았던 피란민들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곳의 원주민에 밀려 황량한 소래포구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실향민의 아픔을 소설로 풀어낸 이원규의 단편 '포구의 황혼'(1987년)의 배경도 소래포구다.

이원규는 소설을 쓸 당시 소래포구의 70~80%가 실향민이었다고 했다. 작가 이원규는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아마도 화수부두, 만석부두 등 기존의 포구가 포화상태가 되면서 포구가 좁아지고 충돌 우려가 있으니까 월남하신 분들이 본토박이를 피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고구한 할아버지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심정으로 소래포구에 왔다. 지금의 소래포구 성당 인근에 가게를 냈다. 교통환경이 열악한 소래포구에서 쌀장사를 하면 경쟁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곡창지대가 있는 군자 등 시흥 서북부지역에서 소래 등 인천으로 오려면 월곶과 노렴(소래포구 일대 옛 지명)을 잇는 노렴나루에서 나룻배를 타야 했다. 나룻배에는 많은 짐을 싣지 못했고 운반 시간도 오래 걸렸다.

인하대박물관에서 펴낸 '인천장도포대지'에 수록된 '노렴마을과 소래포구의 민속생활문화'에 따르면, 군자면 사람들이 곡물 등을 짊어지고 노렴나루를 통해 인천 시내로 나가 다른 물자를 바꿔 오곤 했다. 인천 쪽 사람들이 노렴나루를 건너 시흥 방면으로 가는 일은 드물었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고구한 씨 옛 소래포구전경
1990년대 초 소래포구의 모습. /경인일보 DB

"소래포구라고 아무것도 없었어. 전부가 무허가 판잣집이었어. 배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고기를 잡아도 팔 데가 없어서 서로 사가라고 내놓고 했지. 지금 있는 어시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 시흥 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위험해서 짐을 싣기가 어려웠지."

고구한 할아버지와 같은 피란민들이 정착하고 번창하기 시작하면서는 갯골 건너 큰 포구인 경기도 시흥 포리(현 포동게이트볼장 자리) 쪽이 쇠락했다. 포리는 현 시흥시 수암산에서 시작되는 보통천과 뱀내가 합쳐져 흐르는 물줄기 끝자락의 포구다.

일제강점기 수인선 소래철교 건설로 선박 통행이 불편해진 점도 포리 포구 쇠퇴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소설가 이원규는 "소래가 일어나면서 시흥 포동(포리) 포구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시흥시사'에서도 '배를 타고 인천이나 시흥으로 월남한 정착민들이 소래포구를 부흥시켜 나갔다'고 해 이를 뒷받침한다.

고구한 할아버지는 소래포구의 열악한 환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수인선 협궤열차마저 위태롭게 건너다니는 소래철교(소래포구~시흥) 철로에 자전거 두 바퀴를 올려 놓고 쌀을 실어 날랐다. 달월, 장곶, 거머리, 매화리 등 시흥 일대 정미소에서 쌀을 사 소래포구에서 되팔았다.

소래철교는 높이가 10m에 달하고, 다리 밑으로는 물살이 거세 담이 크지 않으면 맨몸으로도 건너기 어려웠다. 그런 철교를 이용해 할아버지는 자전거에 쌀 두 가마를 실어 날랐다. 철교 통행 자체가 금지된 때였고,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었다.

'노렴마을과 소래포구의 민속생활문화'에 따르면 6·25전쟁 중에는 주민들이 소래철교 위에 널판을 깔아 사람들이 밑으로 떨어질 걱정 없이 철교를 건너다닐 수 있게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철교 통행을 금지했고 널판도 철거했다.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자전거를 끌고 외줄 타기를 하듯이 철길을 건넜다.

"그때는 다리에 초소가 있는데 경찰 2명이 나와서 위험하다고 철길로 다니지 못하게 했어. 나는 파출소랑 쌀 거래도 하고 자주 건너다니고 해서 막지를 않았어. 철길을 웬만한 사람은 어지러워서 못 건너. 나는 딴 길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철길 위에 바퀴를 올려놓고 건너오는 거지. 남들은 기운 좋고 재주 좋다고 그러지만 나는 그냥 간이 콩알만 한 거지. 그래도 한두 번 건너다보니까 계속 건넌 거야. 나는 짐을 실어도 빨리 건넜다고. 저기 소래 역전에 기차가 와서 '뿍뿍'해도 그동안에 건널 수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를 내가 어떻게 건넜나 싶어."

소래철교를 건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얼마나 아찔한 일었던지 윤후명은 장편 '협궤열차'에서 소래철교를 건너다 한 해에 한두 명은 목숨을 잃었다 했다.

'소래에서 남쪽으로의 유일한 통로인 이 협궤철도의 철교는 그토록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데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한 해에 어김없이 한둘은 이승의 집보다도 저승의 집을 택할 수 있었다. 드높이 걸려 있는 철교는 물론 단선인 데다 폭이 좁아서 웬만큼 담찬 사람이라도 오줌을 질금거리며 건너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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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 어시장에 있는 가게 간판에서도 실향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협궤철도의 철교만큼 가냘픈 다리는 시골 시냇가에 걸쳐놓은 나무 징검다리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러나 시골의 나무 징검다리에서 미끄러지면 발을 깨끗하게 하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협궤철도의 철교에서 미끄러지면 전혀 다른 결과를 빚는다.'

이렇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건너 어렵사리 고구한 할아버지가 가져온 쌀은 인기가 좋았다. 품질이 좋은 쌀을 가져와 신문에 나온 곡물 시세를 기준으로 저렴하게 팔았다. 할아버지 가게는 '소래 쌀집'으로 통하며 인천의 반대편 동구 송림동까지 쌀을 공급하기도 했다. 인천 시내 부자들이 돈을 더 주고라도 사겠다고 소래 쌀집을 찾았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외상으로 쌀을 가져가고는 갚지 않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1만원어치 쌀을 준 뒤 매일 돈을 받는 '만원일수'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밀렸다. 어민들이 물고기를 잡아도 소래포구를 찾는 사람이 없어 팔 길이 막막하던 때였다.

70년대 중반 소래포구가 '새우 파시(波市)'로 자리 잡고, 80년대 소래포구 어시장이 북적거려도 외상값은 줄지가 않았다. "돈을 벌어도 저금해서 이자를 받으려고 했어. 외상하면 이자가 없는데 저금하면 이자를 받는다는 생각이었던 거지."

고구한 할아버지는 돈을 갚지 않는 소래포구 사람들이 싫어져서 다른 곳으로 떠날까 하다가도 '밀린 외상값은 받고 간다'는 오기로 버티다 보니 세월이 갔다고 했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도 포대로 쌀을 팔기 시작해 쌀장사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쌀집을 그만뒀지. 소래포구에 와 1~2년 해보자고 시작한 쌀장사가 30년이 됐어. 외상도 안 갚고 사람들도 정이 안 간다고 다른 데로 떠야겠다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 살고 있어. 인천 쌀장사, 부천 쌀장사, 서울 쌀장사, 안양 쌀장사 전부 다 트럭을 가지고 돈도 수없이 들이면서 장사를 했는데, 나는 달랑 자전거 하나로 하면서도 인심을 안 잃었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았지."

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