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병참기지창서 유류 보급… 기름 도둑 들끓어 직접 송유관 폐쇄하기도
제대후 동인천역 앞 노점으로 시작 '전기상회' 차려 주안역쪽 확장·이전
전화국·경찰서와 '거래' 전화기 판매도… 인부 사망사고 겪고 공사 접어

애국심이라기보다는 밥을 먹여주는 곳이 군대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배치된 곳은 인천항 인근 병참기지창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다시 인천 땅을 밟았다. 전쟁통에 부산 포로수용소로 갈 때 인천항이 출발지였다.
"인천항 그 자리를 몇 년 만에 다시 온 거야. 그 부대에서 4년 정도 근무했어. 아직도 거기를 못 떠나. 말하자면 제2의 고향이지."
할아버지가 있던 부대는 육군 제9병참기지창으로, 식량·피복·유류 등을 중부전선 부대에 보급했다. 도로와 철길을 기준으로 인천항(내항) 부두 쪽에는 미군 부대가 있고, 그 맞은편에 제9병참기지창이 있었다. 할아버지 숙소는 지금 이마트 동인천점 자리였다.
중구 신흥동에는 일본인들이 만든 정미소가 많았다. 이마트 동인천점 자리는 '가토(加藤)정미소'였으며, 그 옆 대림아파트 부지는 '오쿠다(奧田)정미소' 자리다. 지금 할아버지가 사는 곳은 수인사거리 인근 경남아너스빌 아파트다.
여기는 '리키다케(力武)정미소'(광복 후 고려정미소로 변경)가 있던 곳이다. 개항 후 인천은 쌀 집산지 역할을 했다. 1880대 후반부터 송학동, 신흥동, 북성동, 만석동 등지에서 일본 자본 중심의 정미업이 성했다. 특히 항만과 철도 인프라 이용이 편리한 신흥동은 정미업을 하는 데 있어 최적의 장소였다.
작가 현덕(1909~?)의 단편 소설 '남생이'는 1930년대 미곡 수출항이었던 인천항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 '노마'의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는데, 부두에서 낙정미(落庭米)를 쓸어 모으는 일부터 시작한다.
지금도 이마트 동인천점 주변에는 빨간 벽돌 건물 몇 채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빨간 벽돌이 전부 우리 피복창고였어. 이런 창고가 강원연탄 있는 데까지 쭉 있었지. 옛날 왜정 때 일본놈들 미곡창고 아니갔어. 내가 사는 아파트도 창고였어."
중부전선에 보낼 피복과 유류 등 군 보급물자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고, 부대 앞으로 2개의 철길이 지나고 있었다. "미군 보급물자가 제2도꾸(dock)에서 내려서 하역장으로 오지. 군사보호구역이라서 (부두를) 민간이 못 썼어. 미군 관할이야. 여기서부터 수인역까지 전부 미군이 관리했어."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7월 펴낸 '인천항사'에 따르면 해방 후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가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구분됐다. 인천 미군항은 1971년 6월 폐쇄됐다. 그해 4월 30일자 경향신문은 '해방 후 미군이 화물선 전용항으로 사용하던 인천 미군항이 오는 6월 30일 폐쇄돼 한국정부에 이양된다'고 보도했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군부대에서 유류 보급을 담당했다. 남구 용현동 미군 유류보급창(POL, 현 SK스카이뷰 아파트)에 있는 유류를 중부전선 부대에 보내는 행정업무였다.

송유관에서 기름을 빼내는 '기름 도둑'도 참 많았다. 결국 송유관을 폐쇄했다.
"파이프라인을 내가 철폐했어. 송유관이 4개가 있었어. 경유 2개, 휘발유 2개. 그런데 여기서 기름을 보내면 3분의 1은 도둑을 맞으니 골치가 아팠어. 그래서 미8군과 협의해서 라인을 없앴지."
송유관은 드럼통을 이용한 화차(貨車) 수송 방식으로 변경됐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빈 드럼통을 미군에 반납해야 거기에 유류를 다시 담아 보내주는데, 빈 드럼통 회수가 안 되었다. 미국 유류회사에서 "드럼통이 없으면 기름을 줄 수 없다"고 나왔다. 파악해 보니 드럼통 30만 개가 부족했다.
"우리가 화차로 도람(드럼통)을 100개 보내주면 50개는 팔아먹는 거야. 기름을 팔아먹어도 공도람은 가져와야지. 도람까지 주고 온 거야. 나중에 생각해 보니 빈 드럼통을 펴서 버스 철판을 때우는 데 사용했던 거야."
용현동 POL에서 큰불이 나 기름 수만 통이 탄 적이 있다. 이때 불에 그을린 드럼통을 펴서 중구 도원동 공설운동장 담장을 두른 일화는 경인일보가 펴낸 책 '인천인물 100人' 정용복(1910~1977) 편에 자세히 나온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군 생활을 할 때 부대 옆에 있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위문편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인천여상 옆에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기관들이 있었고, 주민들은 군복 다림질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고 한다. '인천여상 칠십년사'에는 한국전쟁 이후 학교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인천항과 가까이 있던 인천여상은 전쟁 후에도 400여 명의 피난민이 교사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운동장에 고사포(高射砲) 부대가 남아 있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이 몰래 학교를 들락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미군 헌병이 여선생님을 '양공주'로 오인해 연행하려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제대 후 동인천역 앞 하꼬방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건물 사이에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송판을 대고 자리를 만들었지. 노점 비슷하게 했어. 여기 전부 노점상이었어."
노점에서 돈을 모은 할아버지는 인근에 '신전사'(新電社)라는 이름의 전기상회를 차렸다. 형광등과 전기 부속품, 전기통신 자재를 팔았다고 한다. 그곳에는 지금도 전파상과 조명가게가 밀집해 있다. 할아버지의 신전사 자리에는 '신흥전기'라는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는 노점들이 역전 앞 큰 길가 쪽에 있었어. 굴다리 밑도 전부 노점상이었어. 이것을 양조장 건물 뒤로 옮겨 놓은 거야. 그리고 나중에 양조장 건물을 분할해서 팔았지."
이형근 할아버지는 동인천역 앞에서 60년대 후반까지 장사를 하다가 주안역 쪽으로 가게를 옮겼다. 전기통신 자재 납품과 공사 물량이 늘어나면서 가게를 확장·이전했다.
할아버지의 고객은 전화국과 경찰서였다. 전화국에 전기통신 자재는 물론 전화교환원이 쓰는 방석부터 심지어 은행(은행나무 열매)까지 납품했다. 전화번호를 공개 추첨 방식으로 배당할 때, 은행알에 번호를 적어 통에 넣으면 신청자들이 뽑았다고 한다.
당시 은행알 추첨 방식은 중학교를 배정하거나 전국체전 대진표를 짤 때와 같이 다양한 곳에 활용됐다. 동아일보 1984년 9월 6일자 신문에는 '체전 대진 첫 컴퓨터 추첨'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대진표 작성 방법이 은행알에서 컴퓨터 추첨으로 바뀌는 시기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대진 추첨은 종래의 은행알 추첨이 3시간 이상 소요되던 것에 비해 단 1분이면 모든 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 그러나 이날 체육회 측은 너무 싱겁게 대진 결과가 나오면 시·도 임원들이 허탈감에 빠진다고 진단, 일부러 한 종목씩 추첨을 해 1시간 반 동안을 끌었다'는 내용이다.
할아버지는 전화기를 판 적도 있는데, 당시 전화 1대 놓으려면 집 1채 값만큼 비쌌다고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서다. 대통령비서실이 1970년 5월 15일 작성한 '전화행정 쇄신 방안'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면, 인천지역 전화 가설료는 정부 고시가격의 217%에 달했다.
사거래 시장에서의 전화값은 훨씬 비쌌다. 경향신문 1970년 3월 19일자에는 체신부 장관과의 방담이 실렸는데, 기자는 전화 1대 값이 집값과 맞먹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지 걱정이라고 질문하고 있다. 조선일보도 1973년 11월 18일자 사설에서 '사거래 되고 있는 전화값은 서민들의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만큼 치솟았다'고 했다.

'한국전기통신 100년사'는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인천지점을 우리나라 최초 전화 가입자로 기록하고 있다. 인천전화소가 교환 업무를 시작한 1903년 2월 17일 본점과 인천지점 간 통화가 이뤄졌다. 초기 가입자는 5명으로 공적 성격이 강한 단체였다. 1905년 4월 말 기준 인천 가입자는 28명으로, 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
1950년대 후반 인천전신전화국은 신포동 인천우체국 건물에 있었는데 1964년 9월 중구 신흥동(현 옹진농협 건물 자리)에 사옥을 건립했다가 1983년 9월 남구 숭의동 현 KT 숭의지사 자리로 이전했다.
"전화국이 인천우체국 2층에 있다가 지금 신흥동 농협 자리로 갔어. 근데 그곳이 갯바닥이야. 전화국 기계가 좀 무거워? 자꾸 주저앉는 거야. 길가에 큰 차가 지나가면 전화국 2층이 울릴 정도였어. 할 수 없이 헐었어."
매립지에 지은 건물이 내려앉았다는 얘기다. '인천시 중구사'를 보면 신흥동 사옥 터는 1910~1945년 사이에 공유수면 매립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는 1972년 1월 백령도에서 인부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재기 불능 상태였어.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주니까 남은 게 없더라고. 그나마 신용 하나는 있어서 자재 납품은 계속할 수 있었어. 그때 이후로 공사는 접었어."
할아버지는 1999년 12월 말 신전사 간판을 내렸다. 일흔 넘은 노인네다 보니 관공서 젊은 직원들이 어려워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전화기 판매·수리부터 전기통신 자재 납품에 공사까지 40년 동안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한순간도 마음 속을 떠나지 않는 게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