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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영화평론가
그는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두 손은 뒤로 결박되어 있고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그가 갇혀 있는 곳이 '남산'이라 불리는 곳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문의 흔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를 취조하는 검사는 대학 후배이다. 법 집행을 강조하며 그가 묻는다.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게 언제부터냐고. 그는 조작의 가능성을 예상했음에도 막상 어이가 없다. 자조와 조롱이 섞인 탄성을 내지른다. "에이, 세련된 걸로 해주지!"

김봉한 감독의 '보통사람'은 1987년 민주화 운동 직전 한국사회의 풍경을 담는다. 평범한 경찰에서 안기부의 일을 대신 처리해주며 권력의 단맛을 보는 성진(손현주)과 권력의 범죄조작을 파헤치다가 안기부의 표적이 되는 추기자(김상호)의 엇갈린 행로는 엄혹한 독재정권이 뒤틀어버린 보통사람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손현주와 김상호의 탁월한 연기와 매력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이 지닌 의미를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끝내야 할 지점을 놓치고 만 듯하다. 다소 지루하게 늘어지는 후반의 사설은 의미의 확장과 서사의 집중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허둥댄다.

영화 '보통사람'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히려 익숙하고 촌스러운 권력의 행태이다. 규남(장혁)이 범죄조작을 위해 성진에게 준 자료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일례이다. 논리나 절차는 무시되고 폭력과 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강력할지는 몰라도 규남이 성진에게 준 서류처럼 어색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어색함을 메우기 위해 다시 폭력이 요청된다.

비논리와 폭력의 익숙한 반복은 '간첩 조작'이라는 뻔한 결과를 낳는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뼛속까지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으면서도 그 영민한 두뇌로 상투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추기자의 탄식은 이와 같은 촌스러움의 순환에 대한 지적이자 조롱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폭력이 아니라 말의 정치이며 논리와 설득을 통한 세련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그 촌스러움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니 질문해 볼 일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흘러야 우리는 추기자의 탄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