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평리 '전주 李씨 집성촌'서 10대 후반부터 트럭 조수로 일해
인민군 징집 후 탈출해 국군 자원입대 '인민유격대' 쫓는 운전병 맡아
문경 총격전 못잊어… 참수한 시체중에는 고향 전화국 근무 아가씨도 있어 '충격'
당시 동료들과 친목회 조직 아직 매월 한차례 만나 40여명서 9명으로 줄어 '씁쓸'
전후 서울에서 미군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를 운전해 생계를 꾸렸다.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현대사를 관통했다. 은퇴하고 나서는 인천 부평구에 정착해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이인창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죽평리의 '전주 이(李)씨' 집성촌이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건축설계사로 일했던 할아버지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 아버지가 해방 직후 세상을 뜨자 가세가 기울었다.
이 무렵 10대 후반이던 할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북청의 한 운수회사에 취직해 화물트럭 운전기사 조수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20살 청년이던 할아버지도 인민군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
"9월이 조금 지나서였나, 인민군 한 무리가 북청읍에 와서 내가 타고 있던 트럭을 세우고 '조수 내려와'라며 강제로 끌어내렸어. 지나가는 젊은 사람은 무조건 붙잡더라고.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진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으니까 인원이 많이 모자라서 막 끌고 가나보다 싶었지."
함흥에 집결해 있던 할아버지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는 와중에 인민군 부대에서 탈출했다. 돌아간 고향 땅은 전쟁의 포화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한국군이 북청군으로 진격하기 전 '이승만 만세'라는 문구로 시작해 '태극기를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나오는 집은 폭격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삐라를 뿌렸다고 한다. 교전이 길어진 탓에 삐라를 뿌린 지 일주일 만에야 한국군은 할아버지 고향을 점령했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한동네 사는 또래 청년 17명과 함께 곧장 한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신병 훈련을 받던 도중 중공군 개입으로 이남으로 철수해야 했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서 훈련을 마친 할아버지는 1951년 초반 육군 제2사단 예하 제10경비대대에 배치됐다.
이북 출신 장병이 많았다고 할아버지는 얘기했다. 문경새재를 비롯해 경북 문경, 상주, 안동, 영주 등 소백산맥 일대 빨치산을 토벌하는 게 제10경비대대의 임무였다. 화물트럭 운전 경력을 가진 할아버지는 대대장 운전병을 맡았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말로, 비정규군 유격대를 뜻한다. 게릴라(guerrilla)와 같은 의미다. 한반도 이남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군사조직을 갖춘 북한계열의 빨치산인 조선인민유격대가 전국 산악지대에서 활동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에는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이현상(李鉉相·1906∼1953)이 이끈 남부군(남반부 인민유격대)이 유명했다.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이 섞여 있었다. 국방부 추산에 따르면 1950년 10월에는 1만5천여 명 규모까지 확대됐으나, 남한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1952년 11월 1천300여 명까지 줄었고, 휴전 이후 대부분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빨치산 부대와 마주쳐 전투가 벌어지는 일이 흔치는 않았다. 그러나 산간지대에서의 게릴라 전술에 익숙한 빨치산 부대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 이동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초긴장 상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빨치산 부대는 첩첩산중에 숨어들어 발자국조차도 남기지 않아서 추적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어. 산 아래 마을 어느 집에 소가 한 마리 없어지면 분명히 빨치산이 와서 가져갔다는 얘긴데, 소 한 마리를 잡아도 피 한 방울 남기지 않는 거야."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 빨치산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일종의 금기였다.
빨치산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우태(李愚兌·1922~1997)가 1988년 발표한 최초의 빨치산 수기 '남부군'에서는 ▲똥오줌을 함부로 누어놓으면 그 온도로 빨치산이 지나간 시간과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눈 위를 걸을 때는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밟아야 수십 명이 지나간 발자국이 두세 사람 발자국처럼 보인다 ▲능선을 걷는 사람 그림자는 밤중이라도 뚜렷이 눈에 띈다는 등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행동수칙이 등장한다.
총기 오발을 할 경우 즉결 처분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빨치산 사이에선 총알에서 화약을 꺼내 먹으면 배탈에 즉효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우태는 '남부군'에서 "총탄마다 폭약의 모양과 효능이 약간씩 달라 무슨 탄이 제일 잘 듣는다는 소문까지 났다"며 "하두들 총탄을 까먹으니까 나중에는 금지령까지 내렸다"고 회고했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1952년 7월께 문경 은성탄광 부근에서의 전투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제10경비대대 소속 2개 중대가 빨치산 14명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11명을 사살하고, 3명은 생포했다고 한다. 한국군은 8명의 부상자가 났다.
"사령부에서 사살한 공비의 목을 잘라 보내라고 했나 봐. 시체 5구의 목을 잘라서 상자에 담아 대구 육군본부로 보냈어. 참수한 시체 중에는 고향 북청군 전화국에서 근무하던 아가씨가 끼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 아무튼 그때 공로로 부대원들이 훈장도 받고, 돼지도 잡아다가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그랬어."
험준한 산지의 극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빨치산과 토벌대 간 전투는 어느 전장보다도 치열했고, 이미 죽은 적의 목을 베어 참수할 정도로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참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난 처형 수단이자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의 상징이다.
조선 때에는 일명 '망나니'라 불리는 '회자수'가 참수형을 집행했다. 사형수 중에서 다른 죄수의 목을 베는 망나니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 망나니는 자연히 자신의 사형집행이 미뤄지는 혜택을 받게 된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는 해주의 간상배(奸商輩) 신복동 패거리를 징벌한 장길산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망나니로 전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살인죄로 투옥돼 망나니가 된 우대근이란 인물은 장길산에게 "참말 못할 짓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가 끔찍한 일이오. 일테면 제 목숨 부지하겠다고 남의 목을 치는 사람 백정인 셈이우"라고 한탄한다.
한국군이나 경찰이 빨치산을 참수한 사례는 이인창 할아버지의 증언뿐이 아니다.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에는 국군이나 경찰이 유격대원(빨치산)을 생포하면 주민들을 모아놓고 논두렁이나 산기슭에서 총살하기 일쑤였는데, 미군 고문관들에게 토벌 실적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를 잘라갔다는 내용도 있다.
한국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말미에는 수류탄으로 자폭한 빨치산 염상진의 목을 토벌대가 고향으로 보내는 대목이 나온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있었다. 동아일보 1950년 4월 14일자 신문을 보면, 한국군 부대가 경북지역 빨치산을 지휘하던 이호제를 사살하고 "이를 확인코자 시체에서 목을 잘라 군 당국에 이송했다"고 나온다.
이호제의 빨치산 부대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계열 군인들이 1948년 10월 무장봉기한 '여순(전남 여수·순천)사건' 이후 남한에서 조직돼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직전 군과 경찰에 의해 토벌됐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휴전협정 이후 토벌대에서 제주도에 있는 육군 훈련소로 근무지를 옮겨 간부 차량을 운전했다. 제주도에서 1년가량 더 복무하다가 제대했다.
제10경비대대에 함께 복무했던 사람들끼리 친목회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매월 28일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모인다. 회원은 40여 명이었는데, 현재는 세상을 뜨거나 몸이 불편해 9명만 친목회에 나오고 있다고 한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