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1
인천 남구 수봉공원에 있는 현충탑. 김창일 할아버지가 1972년 인천시청 공보실에 근무할 당시 인천 출신 한국전쟁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시설이다.

임시직 얻은 뒤 절차 거쳐 임용돼
당시 낙하산 많은 탓 後시험 치러
만국공원 움막집 철거가 첫 업무
실향민 아픔 알기에 보상 신경 써

선인학원 백인엽 장군과 일화도
경인고속도로 '입김 있었다' 증언
체전성공 공로 국장 승진 앞두고
둘째 아들 긴급조치 위반해 퇴임
고향 그리움 달래는 망배단 있고
현충탑 위치한 수봉공원 큰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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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재령군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91)는 전쟁이 끝난 뒤 인천에 자리 잡아 공무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1954년 김정렬 인천시장에게서 임시직을 얻은 뒤 다시 공무원시험 절차를 거쳐 정식 임용됐다. 당시 인천시청이 30명을 모집했는데 300~400명이 응시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할아버지는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해 지금의 '공시족'처럼 공무원시험 책을 달달 외웠다고 한다. "국어 시험도 보고 역사 시험도 보고 영어는 조금만 할 줄 알면 됐던 것 같아. 그때도 공무원시험 책이 있어서 그것만 보고 외웠지. 시험을 본 다음에는 면접도 보고 지금이랑 비슷했던 것 같아."

요즘 사회적 문제로까지 부상한 '공시족'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과거시험은 고려 광종 9년(958년)때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전에는 관직을 신분에 따라 나눠 갖거나 천거하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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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쓴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우리나라는 옛날에 과거 제도가 없었는데 고려 광종 때에 주(周)나라 사람 쌍기가 사신을 따라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과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칙령에 따라 관료를 시험으로 뽑았다.

한국전쟁 전후 혼란했던 시기 뒷배경이나 인맥을 이용해 공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정부가 무능한 공무원을 걸러내기 위해 재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선(先)취업 후(後)시험'인 셈이다.

동아일보 1953년 2월 5일자는 "수많은 공무원 중에는 권력과 재력 등 배경의 힘으로 고위고관의 정실인사로써 중요한 자리에 앉아있는 무능력한 자들이 허다함에 비추어 고시 위원회는 전국 20만명에 달하는 국가공무원에 대하여 일제히 전형 시험을 실시한다"고 보도했다.

따지고 보면 김창일 할아버지도 시장 추천이라는 인맥으로 공직에 입문해 시험으로 정식 임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인천시청 공무원이 돼 처음 맡은 업무는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에 우후죽순 들어선 피란민 촌을 철거해 정비하는 일이었다. 피란민들이 아무렇게나 땅을 파고 살았던 움막집은 화재 우려도 있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 대상이 됐다.

할아버지는 같은 처지인 피란민을 내쫓는 일이 마뜩잖았지만 그렇다고 지시받은 업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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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일 할아버지가 인천 중구 용동 집에서 공직생활과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받은 각종 상패를 보고있다.

할아버지가 했던 자유공원 정비 사업은 당시 인천시청이 발행한 '인천공보(仁川公報)'에 기록돼 있다. 인천시립 미추홀도서관에 보관된 1953년 6월 3일자 '인천공보'에는 '만국 공원 주변 바락크 철거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바락크(barrack)는 군대 막사나 임시로 지은 건물을 뜻하는데 보통 피란민의 움막집을 그렇게 불렀다. 휴전 1개월 여 전의 상황을 전해주는 이 기사는 "만국공원 주변에 피난민 토막집이 무려 119건에 달하고 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공원유지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피란민촌 철거사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시는 무단건축물을 자진 철거하면 학익동 소재 시유지에 대토를 알선해 주겠다고 했다. 이때는 표양문 5대 인천시장 재직(1952년 5월~1954년 2월) 당시다. 할아버지가 1954년 2월 김정렬 시장이 취임한 이후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니 만국공원 피란민 철거 사업은 표양문 시장 때 시작해 김정렬 시장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움막을 철거하면 다시 새로운 움막이 들어서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실향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움막을 짓고 버티는 이들을 매정하게 내쫓지는 못했다.

"보상을 해야 하니까 자유공원에 가서 움막집이 몇 채 있는지 그림을 그려 파악을 했는데 다음날 나가보면 또 몇 채가 더 늘어나 있는 거야. 땅을 파고 나무 주워다가 기둥 몇 개 세워 놓은 다음에 가마니를 깔고 드러누우면 그게 자기 집이라고 우기는 거지. 그래도 그 사람들 전부 보상해서 내보냈어."

그렇게 피란민이 떠난 자유공원에는 표양문 시장 때부터 계획했던 아동 유희장(놀이터)이 들어섰다.

인천공보 1955년 7월 25일자는 "인천시가 미군대한원조(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의 자재원조를 받아 만국공원에 그네, 미끄럼틀 등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1957년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해 맥아더장군 동상이 들어섰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1967~1968년 경인고속도로 건설과 주변 지역 구획정리 사업을 감독할 당시 공사현장 주변의 선인학원 이사장인 백인엽 장군이 자신의 사무실에 매일 같이 드나들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경인고속도로는 당시 국가 주도 사업이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치단체가 주체가 돼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고속도로건설사업에 선행되는 구획정리사업 등이 지자체 몫이었다. 한국전쟁의 영웅인 '쓰리스타' 출신 장군이 실향민인 말단 인천시 공무원에게 절절매는 모습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내가 건설과에 있을 때 경인고속도로 총 관리를 하는데 경인고속도로 경계를 측량하니까 선인학교 그러니까 지금 인천대학(제물포 캠퍼스)이 잘려가게 됐다고. 근데 백인엽이가 지프를 타고 내려와서는 하는 얘기가 '야 학교 잘리면 안 되는데 남겨달라. 학교 피해서 가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 가는 길로 된 거지."

경인고속도로 자리가 선인재단의 입김 때문에 틀어졌다는 세간의 소문이 당시 그 업무를 담당했던 공무원인 김창일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인천공보
◀ 1953년 6월 3일자 인천공보에 실린 자유공원 피란민 철거 기사.

김창일 할아버지는 공직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수봉공원 현충탑 건립 사업이라고 했다. 1970년대 초반 할아버지가 인천시청 공보실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당시 인천의 전쟁 유가족들은 서울 동작구 현충원까지 가서 참배해야 할 정도로 불편을 겪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현충탑 건립 사업을 맡아 처리했다.

"그때 수봉공원 사업 부지가 안동권씨 일가 공동묘지 부지였는데 서울까지 가서 계속 설득했지. 결국 구획정리 사업을 하고 남은 체비지와 바꾸는 조건으로 땅을 샀어. 예산이 부족하니까 내가 건설과에 있을 때 경인고속도로 공사했던 동아건설이랑 신흥산업 불러다 나중에 공사 줄 테니까 불도저 몇 대 가져와서 땅 좀 밀어달라고 시켰지. 그땐 내가 얘기하면 다 됐어."

현충탑은 기단 5.45m, 탑신 14.7m, 총 20.15m 높이로 인천 출신 한국 전쟁 전몰장병 379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할아버지는 1972년 현충탑을 세운 뒤 대한전몰군경유족회로부터 감사패와 공로패를 받았다. 이 패는 지금 할아버지의 집에 고이 모셔져 있다.

승진을 목전에 둔 1970년대 후반 할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공직생활을 접어야 했다. 둘째 아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다. 인천시 새마을과장이던 할아버지는 1978년 10월 인천체전 성공 개최 공로자로 인정받아 국장 승진을 예약하고 일본으로 공로여행을 가려던 참이었다.

이때 천주교 인천지역 대학생연합회 간부였던 둘째 아들이 인하대에서 유신헌법 철폐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5월 13일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정부비방이나 학생들의 집회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한 사람 외에도 그가 속한 단체까지 처벌하도록 했다. 공무원 아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고 하니 주변의 눈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그래도 아들의 구명을 위해 여기저기 힘을 썼다. 인천시장 출신 유승원 국회의원을 찾아가 탄원서를 부탁해 공화당 의원들의 탄원을 받았고 둘째 아들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풀려난 뒤 사직서를 쓰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안기부의 압력에 따른 일종의 '권고사직'이었다.

할아버지가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가계는 부인이 도맡아야 했다.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할아버지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인천 중구 신흥동 일대에서 '돈놀이'를 해 재산을 불렸다. 부인은 남편 모르게 모은 돈으로 중구 용동 지금의 동인천길병원 맞은편에 있는 낡은 목조 기와집을 사서 헐고 1982년 4층짜리 여관 '동보장'을 지었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
1982년 지금의 동인천길병원 맞은편에 세운 4층짜리 여관 '동보장'. 김창일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 건물 4층 살림집에 거주하고 있다.
4층은 살림집으로 쓰고 나머지는 여관으로 썼는데 뱃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퇴직 후 김창일 할아버지는 양정과장 이력을 살려 대한곡물협회 인천시지회 사무국장을 했고 이후 인천시 축구협회 부회장, 직장 새마을운동 인천시협의회 감사, 인천지검 소년선도위원으로 활동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동보장 4층 살림집에 산다. 부인은 201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의 집 이곳저곳에는 공무원 재직시절이나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받은 각종 상패가 놓여 있다.

할아버지는 가끔 아들의 부축을 받아 수봉공원을 찾는다.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는 현충탑이 있는 곳이고 자신을 공직에 입문시켜 준 김정렬 시장의 공적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실향민들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망배단까지 있으니 수봉공원이야말로 김창일 할아버지의 인생이 녹아있는 곳이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