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가 지도에 고향 모습 그려 눈길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 해서 '나무리벌'
피란 떠날 때까지 아버지 정미소서 일해
소설가 형님 글에 집·음식 유복함 드러나
아내 손맛 북한 전통음식 '김치밥' 그리워
한반도 대표 곡창지대 쌀알 길고 맛 좋아
일제 한일합작 회사 앞세워 토지 빼앗아
김소월 詩에 착취당한 소작농 슬픔 담아
이어 재령 출신 나석주는 폭탄으로 '항거'
자작농 쌀도 수출 명목으로 헐값에 판매

몇 해 전 아들이 인터넷 위성사진을 출력해 벽에 붙여준 적이 있었는데 옛날 집이며 논이며 다 사라져 버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며 본인이 기억나는 대로 그렸다.
할아버지의 고향 재령군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너른 평야에서 질 좋은 쌀이 생산되는 재령벌은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고 해 '나무리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재령군 북쪽 북률면에서 동강(재령강)과 서강이 만나는데 할아버지네 집은 서강쪽에 있는 서호면 신환포리다.
집에서 철교를 건너 강 맞은편 신천에 할아버지네 정미소와 논이 있다. 서호면 남쪽이 재령읍인데 할아버지는 읍내의 명신중학교를 다녔다. 지도 속 집과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동그란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할아버지는 1946년 12월 집안 소개로 역시 재령 출신 아내와 결혼하고 피란을 떠날 때까지 정미소를 운영하는 아버지 일을 도왔다.
할아버지는 6남매 중 둘째인데 두 살 위 맏형이 바로 예총 인천지부장을 지낸 소설가 김창황이다. 김창황의 수필집 '고향'에는 재령 나무리벌에 대한 그리움이 철철 넘친다. 이 중 '생가(生家)'라는 글에는 할아버지네 집의 유복함이 잘 드러난다. 마을 이름도 '대부촌(大富村)'이었다.
'서남쪽으로 재령강이 흐르고, 정방산 노적봉과 서쪽으로 구월산 사황봉이 우뚝 솟은 나무리벌 나의 고향 대부촌은 모두 합해야 50호가량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부락이다. 사각으로 채목한 목조건물이지만 앞뒤 채로 나누어 온돌방이 7, 8개나 되고 헛간도 넓게 꾸며졌다. 앞에는 1천평을 훨씬 넘는 뜰이 펼쳐져 있다.'
김창황은 이 글에서 자신이 6살 때 아버지가 대부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분가했다고 했으니 할아버지네가 서호면 신환포리 부근에 따로 자리 잡은 것은 김창일 할아버지가 4살 때인 193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입구(口)자 모양의 큰 집 마당 가마솥에는 항상 일꾼들을 위한 생선국이 끓고 있었고 사랑방에도 사람이 넘쳐났다"고 기억했다. 농번기 때면 동강과 서강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교량에 일을 찾는 사람들이 몰려 인력시장을 형성했다고 한다.
사랑방에 귀한 손님이 오면 놋쟁반에 소고기와 채소를 보기 좋게 담아 육수를 부어가며 전골처럼 먹는 평안도 음식 '어복쟁반'도 대접했다고 한다. 어복쟁반은 머리를 맞대고 큰 쟁반을 기울여가며 먹는 음식이라 둘러앉은 사람들이 친분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되는 음식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생선이 들어가지 않는데 '어복'이라고 부른 것은 '우복(牛腹)'을 잘못 발음하면서 전해진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할아버지가 남한에 와서도 즐겨 먹은 음식은 '김치밥'이다. 김치밥은 불린 쌀에 잘게 썬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어 밥을 지은 뒤 양념장과 섞어 먹는 북한 전통음식이다. 할아버지는 2010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김치밥이 너무 먹고 싶어 직접 만들려고 나선 적도 있다.
하지만 재령 김치밥은커녕 정체불명의 밥만 짓고 말았다. 김치밥 생각이 나면 아내가 그립고, 아내 생각이 나면 김치밥이 더욱 그립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0]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下)](https://wimg.kyeongin.com/news/legacy/file/201705/20170524010008081_3.jpg)
나무리벌은 재령군 북부와 신천군, 안악군에 걸친 곡창지대다. 재령쌀은 쌀알이 길고 밥맛이 좋아 진상미로 사용됐다.
조선 영조 27년(1751년) 쓰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 황해도 편에는 "황주, 봉산, 서흥, 평산, 안악, 문화, 신천, 재령 이 여덟 고을은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았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
강 동쪽, 서쪽 언덕에는 모두 물을 사이에 두고 긴 둑을 쌓았으며 둑 안쪽은 모두 벼 심은 논이다. 바라다보아도 끝이 없어 중국의 소호 지방과 같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낟알이 길고 성질이 차져서 다른 지방 쌀과 다르다.
그러므로 내주(內廚·임금과 왕비의 음식을 마련하는 주방)에서 어공(御供·임금에게 바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은 이 지방 쌀뿐이다"고 나온다.
1992년 2월 21일 정원식 당시 총리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과 나눈 대화에서도 재령 쌀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북한은 방북단에게 재령 쌀을 대접했는데 김 주석은 재령 출신인 정 총리에게 "재령 쌀이 좋아요. 조선 때도 재령 나무리벌 쌀을 가져다 먹었다지. 재령은 우리나라에서 쌀농사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요"라고 했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 유명한 평야가 평안도 열두삼천리벌, 황해도 나무리벌, 옹진벌, 연백벌, 전라도 만경벌인데 그 중에 나무리벌이 제일 유명해. 나무리벌에서 나는 쌀은 따로 1등급, 2등급, 3등급을 매기지 않고 창고에 보관했지. 어차피 다 1등급인데 등급을 매겨서 뭐해. 그만큼 쌀이 좋아"라고 말했다.
좋은 쌀을 생산해내는 나무리벌은 일제 양곡 수탈의 표적이 됐다. 일본은 1908년 농업, 토지매매·임대·관리 등의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회사)라는 한일합작 회사를 설립했다. 우리나라는 20만주 가운데 30%인 6만주를 토지로 출자했는데 전체 출자토지 2천433정보 중 재령 지방 논이 1천235정보로 절반을 넘었다.
일제는 일본인을 재령으로 이주시켜서 쌀을 생산하게 했고 국유지에서 소작을 했던 농민들에게는 고율의 소작료를 떼어갔다. 동척회사는 실제로 45%의 소작률을 내세우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70%가 넘게 소작료를 받기도 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나무리벌의 소작농들은 1924년 대대적인 소작쟁의를 벌였다. 이때 나온 시가 동아일보 1924년 11월 24일자에 실린 김소월의 '나무리벌의 노래'다.
'나무리벌의 노래'는 지금도 일제 수탈에 대한 항거를 빼어나게 묘사한 작품으로 꼽힌다. 수탈당한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 시베리아로 이주해야 했던 당시 시대 상황을 그렸다. 척박한 만주땅과 기름진 나무리벌이 대비된다.
1926년 12월 28일 토지수탈을 상징하는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나석주(1892~1926)가 바로 재령 출신이다. 동척회사의 양곡 수탈을 직접 목격한 그는 안악 출신인 백범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독립투사가 됐다.
이 사건은 보도가 금지됐으나 일제가 게재금지를 해제한 이듬해 1월 13일 동아일보 호외판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백주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 동척과 식은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하야 일거에 7명 저격'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이 달렸다.
김창일 할아버지 집은 자작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생산된 쌀을 모두 일본에 팔아야 했다.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농지를 개량해 쌀 생산량을 늘리고 증산된 쌀의 60~70%를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 나무리벌에도 개간 사업이 활발히 진행됐고 안녕수리조합, 재녕수리조합 등이 설립됐다. 하지만 쌀 생산량 증가율보다 수출 증가율이 더 높았다. 김창일 할아버지네도 약간의 쌀값을 받기는 했으나 수출이라는 개념보다는 강제로 빼앗아 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수탈을 당했다.
"그때 재령 쌀은 모두 동경(東京·도쿄)으로 가게 돼 있었어. 진남포에서 500명이 탈 수 있는 연락선이 들어오면 신환포리에서 쌀을 싣고 요코하마항으로 가는 거지. 황해도에서 나는 쌀이 200만t 정도 되는데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신환포리로 다 모이게 돼 있어. 일본 사람들이 나무리벌 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고 했어."
일본으로 쌀을 보낼 때는 현미로 보냈다고 한다. 쌀을 모두 도정해서 배에 실으면 이동하는 동안 수분이 날아가서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논에도 전기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수한 쌀을 잘 건조시켰다가 도정해 현미를 만들었다.
수확한 쌀은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할아버지네는 일제 몰래 쌀을 빼돌려 평양에 내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야미(やみ)'라고 했는데 '뒷거래'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재령 쌀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아 웃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평양에 내다 팔았다.
할아버지네는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북한 토지개혁의 대상이 되면서 몰수 됐다. 땅을 잃고 고향을 잃은 것을 이제 와 아까워 하면 무엇 하겠는가. 오직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울 뿐이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언젠가 중국 쪽 인맥을 거쳐 재령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 정도만 확인한 적도 있다. 북한군 소좌를 했던 동생(김창설)이 전쟁 후 안악군에 있는 농장에 생존해 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