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연중기획  실향민 홍순주 할아버지  북한 포구 바라보며 설명  메인
개성출신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도 철산리 평화 전망대에서 지척으로 보이는 북녘땅을 가리키며 휴전 직후 남·북을 오가며 물물교환하는 '이북장사'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서 대학 다닐때 전쟁 발발 휴전 후 고향 갈 수 없게 돼 강화에 자리 잡아


개성상인 유명세 한창수 회장과 둘째형이 각각 맡아 운영… 배로 1.8㎞ 북한 드나들어

군 당국 보호하에 서로 첩자 보내기도 "장사꾼이 이중간첩 노릇"

이승만 정권 군부 '돈 줄' 불구 군내부 갈등 탓 오래 못가

개인훈련으로 온갖 운동 섭렵 '민간 특공대' 잡고 강화 '주먹' 평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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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이 물물교환을 한다? 꽉 막힌 요즘 남북관계에서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교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참혹했던 한국전쟁 직후 남과 북이 물물교환을 했다는 얘기를 개성이 고향인 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해 주었다.

그러니까 휴전이 있고 나서 1950년대 중반 3년 정도 남과 북이 강화도와 개풍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하는 남북교역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이북장사'라고 불렀다. 지난 5월 9일 강화도 자택에서 첫 인터뷰를 지켜보던 홍순주 할아버지의 부인 김기희(85) 할머니는 이것저것 자꾸만 캐묻는 기자가 할아버지 얘기를 의심이라도 한다고 여겼는지 부엌으로 가서는 참나리 그림이 선명한 법랑 그릇을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이 법랑이 이북장사할 때 북에서 가져온 것인데 지금도 쓴다고 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1학년이었다. 당시는 5월 입학이었으니 대학 새내기 생활 2개월째였다. 1951년 초 군에 입대했다. 통신병이었는데 최전선에 배치되지는 않았다.

휴전이 되었지만 더 이상 고향 개성에는 갈 수가 없었다. 전쟁 전 개성은 38선 이남이었는데 휴전이 되면서 그만 개성이 휴전선 이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형님이 자리를 잡은 강화를 찾았고, 지금껏 살고 있다.

인천연중기획  실향민 홍순주 할아버지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 평화전망대에 설치된 위치도에서 개풍군 해창포를 찾아 가리키고 있다.

이북장사는 12살 터울이 지는 둘째 형(홍순형)이 했다. '대영상사'라는 이름을 단 어엿한 회사였다. 읍내에 사무실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그 형에게서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이북장사'는 두 패가 맡아서 했다. 할아버지네 '대영상사'와 또 다른 한 명이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유명했던 서울 을지로 입구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1919~2000)이다.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한국전쟁 직후 '이북장사' 대목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 개성 출신 기업인들의 이야기를 묶은 '개성상인'이란 책에 한창수 회장도 들어가 있는데 거기에도 강화도 '이북장사' 부분은 빠져 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한창수 회장이 강화에서 돈을 번 뒤 서울로 가서 을지로 개성상회를 열었다고 했다. 한창수 회장이 강화에서 '이북장사'를 할 때는 '개성상회'와 같은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고 그냥 강화읍 서문 밖 개인 주택을 하나 세 얻어서 살림집 겸 사무실로 썼다고 했다.

휴전 직후 남북을 오갈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인이 어떻게 서로의 물품을 교환하는 장사를 할 수가 있었을까. 이 '이북장사'는 군(軍) 당국이 뒷배를 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홍순주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대영상사' 쪽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던 김창룡 당시 육군 특무부대장이 밀어줬다. 한창수 회장의 뒤에는 다른 기관이 있었다. 북쪽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한에서는 페니실린 같은 의약품과 신발, 옷가지 따위를 싣고 갔고, 북에서는 원산 북어, 명천 다시마, 은수저 따위의 물건이 넘어왔다. '이북장사'는 배로 이루어졌다. 강화에서는 철산리 산이포에서 출발했으며 개풍의 영정포나 해창포를 드나들었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둔 철산리와 해창포는 직선거리로 1.8㎞, 강화에서 북녘 땅을 잇는 최단거리 코스다. 배는 밤에만 움직였다. 언제 돌아올지는 기약이 없었다. 1주일도 걸렸고, 한 달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북장사'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장사였다.

위험한 만큼 이문도 많이 남았다. 남북의 군 당국은 서로 '이북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상대방의 정보를 캐냈다. 물건을 싣는 그 배에 서로 간첩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군 당국에서는 간첩이 타고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화에서는 검거하지 않았다. 그 간첩이 강화에서 뱃길로 인천 괭이부리 쪽 부두에 내린 뒤에야 검거했다. 이렇게 해야 '이북장사' 하는 사람이 밀고자 신세를 면하기 때문이었다.

인천연중기획  실향민 홍순주 할아버지 야구 선수 모습
고등학교 야구 선수 시절 홍순주 할아버지.
"여기 철산리에서 개풍군 영정포를 가는 거지. 들어갈 때는 한국물건을 갖고 가서 나올 때는 거기 물건을 싣고 나왔어. 지금으로 치면 한 번 갈 때 한 2천만원어치 가져가서는 그쪽 물건과 바꿔 팔면 곱절도 더 남았던 것 같아. 그때 강화에는 기관이라는 기관은 다 들어와 있었거든. 그 배로 서로 첩자를 보내고는 했지. 어떻게 보면 '이북장사'하는 사람이 이중간첩 노릇을 한 거지."

'이북장사'로 강화에서 돈을 번 뒤 서울로 뜬 사람은 한창수 회장 말고도 또 있다. 남쪽에서 가져간 물건 중에 제일 많은 게 약이었는데 이 약을 독점 공급한 이가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제약업계의 큰 별로 불리던 서흥캅셀 창업주 양창길 회장(1923~2016)이다. 양창길 회장이 강화읍에서 고려약방을 내고 약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북장사'를 하는 양대 산맥이 모두 개성 사람이니 약을 대는 곳도 개성 출신인 양창길 회장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당시 강화에는 고려약방 이외에 십자당약방이 한 곳 더 있었다고 홍순주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강화에서의 은밀한 '이북장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개성상인들에게 귀한 밑천이 된 셈이다.

군부 세력에게는 뒷돈이 되기도 했다. 그 '이북장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이북장사'가 끊어진 게 군 내부 갈등 때문이었다고 했다. 원용덕 헌병사령관 쪽에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칠 때 '이북장사'도 타깃이 됐다고 했다. 헌병대가 들이닥쳐 이북에서 가져 온 물건을 죄다 압수해 갔다고 했다.

인천연중기획  실향민 홍순주 할아버지
'이북장사'를 하던 둘째 형에게 받은 물건중에 유일하게 남은 법랑 그릇을 보여주고 있는 홍순주 할아버지.

할아버지 둘째 형의 '이북장사'를 밀어줬다는 김창룡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도 이북실향민이었다. 현대사를 다룬 책들은 대개가 그를 친일파 군인의 대표주자로 거론한다.

일본과 한국의 만주 군맥(軍脈)을 다룬 책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는 만주국 또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나 헌병으로 위세를 떨친 대표적 인물로 김창룡을 소개한다. 이 책에 따르면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으로 있으면서 3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한 죄로 해방 후 북한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호송 도중 도망쳐 남한으로 내려와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어 군 내부 좌익 색출로 이름을 떨쳤다. 최근 나온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이란 책에서 저자 신복룡 교수는 김창룡의 별명이 'Snake Kim'이었다고 소개했다. 아마도 빨갱이 색출에 유난한 능력을 발휘했기에 그렇게 별명이 붙었음직하다.

이런 김창룡도 같은 일본군 출신 원용덕 헌병사령관의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1950년대 편 3권'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 원용덕의 헌병대와 김창룡의 특무대를 통해 군부를 견제하고 사찰기관 상호간 경쟁을 유도하면서 사찰기구의 독점을 방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또 군부에 파벌을 키워 서로를 견제토록 했다. 이 견제에 김창룡이 걸린 듯하다. 하지만 김창룡의 '이북장사'가 적발됐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50년대 중반 전쟁 직후 강화도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남한 땅에 있던 군부대라는 군부대는 강화에 소속 부대를 주둔시켰고, 정보기관은 정보기관대로 강화에 상주했다. 북한군 복장을 하고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는 군인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었다.

북파공작부대 같은 특수부대였다. 그 군인들이 제대한 뒤 머무는 곳도 강화였다. '민간 특공대' 격으로 생활하던 그들은 술만 먹었다 하면 여기저기서 주먹질을 하면서 행패를 부리곤 했다. 이들을 맨주먹으로 제압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홍순주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주먹으로 일약 스타가 된 것은 강화를 주먹으로 주름잡던 '민간 특공대원'을 돌려차기 한 방에 쓰러뜨린 일화가 퍼지면서다. 그 얘기가 나간 뒤로는 누구도 할아버지를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할아버지는 체구가 큰 편은 아니다. 키 167㎝에 몸무게 55㎏ 정도다.

할아버지가 강화의 유명한 주먹을 거꾸러뜨린 것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고향 개성에서 중학생 시절부터 싸움의 기술을 연마한 '낭중지추'의 숨은 고수였다. 할아버지가 중학교 2학년 시절, 해방되던 해 봄에 교실에서 시비가 붙었다.

쉬는 시간 교실에 혼자 남아 책을 읽고 있는데 완장을 찬 주번이 나가라면서 발길로 툭툭 찼다. 홧김에 그 주번 학생을 때려주었다. 그 친구는 며칠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그 뒤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권투부장 일행이 찾아왔다. 그 주번이 분풀이하기 위해 권투선수를 부른 터였다. 할아버지는 그 권투선수에게 많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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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도 평화 전망대에서 경인일보 정진오 기자에게 이북장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공부보다는 동네 뒷산에 올라 운동하는 것에 집중했다. 산을 뛰어 오르내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나무 가지 위로 깡통 같은 것을 매달아 놓고 점프하면서 발차기를 하거나 집 뒤에 있던 방공호 모래 가마니를 주먹으로 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1년 정도는 계속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만능 스포츠맨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높이뛰기, 장대높이뛰기, 넓이뛰기, 100m 같은 여러 육상종목의 대표선수로 뛰었다. 고등학교 때는 야구도 했다. 싸움과 육상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역대 유명 주먹들 중에도 육상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경우가 많다. 조성식 기자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란 책을 보면, 육상이 싸움에 필수적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맨손 주먹 1인자 조창조 편'에서 맨손으로 붙어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조창조 씨가 바로 초등학교 때 육상 선수였다.

여기서 조 씨는 싸움도 뛰는 게 뒷받침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홍순주 할아버지가 갖춘 싸움의 기본이었다.

강화의 알아주는 '주먹'이 된 할아버지는 이후 초등학교 교사이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강화에서 수많은 사회단체에서 활약했다. 또 선출직으로 뽑히기도 했다. 개성인삼을 강화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