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0년대초 재배 시작 해방직후까지 '미미'
개성인삼 근원은 경상·전라서 전파 '추측'
이북장사 접은 둘째 형따라 농사 뛰어들어
아내도 초교 교사 그만두고 밭일 뒷바라지
거름 만들고 종삼 키우기 등 만만찮은 작업
개성·강화는 인삼 재배 넘어 상호보완 관계
껍질 깎는 일거리 등 후한 인심 동네서 인기
도둑 들끓어 삼포마다 관리자 두고 밤 순찰
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휴전 되던 해에 강화에 정착한 뒤로 가장 오래 한 일은 인삼농사다. 20년 정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강화인삼의 명성이 높았던 데는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 출신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강화에 많이 살게 된 이유가 크다.
이들이 있었기에 개성 인삼의 전통이 그대로 강화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강화도에서 인삼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강화군청을 비롯한 주요 행정관서에서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1980년 '지리학 제22호'에 실린 논문('인삼 재배지역의 형성과 전파에 관한 연구-강화도를 중심으로')속에서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강화도의 인삼재배가 개성인들의 왕래에 의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보면서, 그 최초 시작점을 1903년으로 밝히고 있다.
이때가 논문에서 말하는 1차 강화도 인삼재배의 시기이다. 2차는 홍순주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의 피란민들이 강화도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논문에서 인용한 1973년도 전국 삼업조합별 인삼 경작면적을 보면, 강화는 홍삼재배면적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홍삼과 달리 백삼은 금산 지역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강화는 2위였다. 이 시기는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한참 인삼농사를 지을 때다.

이 기고문에 붙은 강화 지역의 '밭 종합이용면적 상황표'에 따르면 밭의 총면적 4천15정(町) 중 인삼 재배 면적은 고작 36정에 불과하다. 보리가 2천739정으로 가장 많았고, 채소가 850정, 감자가 160정, 과수 95정, 밭벼 30정, 묘목 5정, 기타 100정 따위였다. 당시 강화도에서의 인삼 재배가 그리 성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개성의 향토사학자 송경록이 지은 책 '개성 이야기'에서도 '개성 지방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인삼을 재배하였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도 뚜렷하게 개성인삼의 근원을 드러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실감나게 개성인삼의 시초를 밝히고 있는 것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이다. 의적 장길산의 후원자가 되는 개성상인 박대근과 전라도 화순에서 올라온 가난한 모녀(母女)가 극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인삼 재배 기술이 개성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모녀가 지니고 있던 전라도의 산삼 재배 기술과 개성의 자본이 만나 새로운 개성인삼이 되었다는 게 작가 황석영의 기발한 풀이이다.
홍순주 할아버지가 인삼 농사에 뛰어든 것은 역시 강화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둘째 형(홍순형)이 삼포(蔘圃)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2살이나 많은 형님은 상편(1일자 9면 보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휴전 직후 '이북장사'를 3년 정도 하다가 군부의 내부갈등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그 뒤 삼포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홍순주 할아버지는 원사(原絲) 장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 종로 4가에 가서 실을 떼어다가 강화 장터에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강화에 직물산업이 발달해 집집마다 직조를 하다시피 할 때였다. 2년 정도 했는데 이문을 남기지는 못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당신이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즈음에 5살 아래인 김기희 할머니와 결혼을 했다. 1957년이었다.
인천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인 강화도 합일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김기희 할머니는 "(홍순주 할아버지가) 알땅(불량배와 비슷한 의미)이어서 식구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결혼을 반대했다"면서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장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결혼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었고 곧바로 집안에서 인삼 일 뒷바라지를 했다.
인삼 농사는 정말이지 쉽지가 않았다. 삼밭에 거름을 주고, 삼을 심어 관리하고, 종삼(種蔘)을 키우고 하는 일이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4~5년근에서 씨앗을 채취해서 종삼을 만들고, 그걸 깨끗한 모래에 섞어서 아침저녁으로 100일 동안 물을 주고 하는 그 작업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종삼을 심는 삼포에 주는 거름이 중요하다. 그 거름을 만들기가 또한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좋은 거름은 3가지를 섞어야 한다고 했다. 구벽토, 구재, 가답이다.
오래된 집터나 벽에 붙은 흙이 구벽토이고, 솥이나 굴뚝, 방고래 같은 곳에 쌓인 검댕이 구재이다. 또 낙엽이나 콩 썩은 것이 가답이다. 이런 것들을 구해서 거름을 만들어 삼밭에 냈다. 이게 바로 전통 개성 방식의 인삼재배법의 일단이다.
해방 직후부터 인삼 재배에 있어서 강화와 개성은 아예 한 몸이 되었다. 1946년 10월 16일자 '자유일보'는 '강화인삼 산지 개성 관내로 편입'이란 기사를 실었다. 강화인삼조합에서 전매국 지정 구역으로 편입해 달라고 오랫동안 요구해 결국 개성 관내로 구역이 편입되었고 강화인삼조합은 해산을 했다는 내용이다.
개성과 강화도는 인삼 재배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분야에서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다. 고려 때는 개성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개성의 일반 백성들이 위기에 처한 강화 주민들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
그 점은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첫 번째 학술총서로 펴낸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에 상세하다. '개성부원록'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가 프랑스군에게 침략을 당하자 개성의 백성들로 원군을 구성해 강화를 수복하기 위해 출정한 기록이다.
개성 사람들이 강화 주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강화와 개성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홍순주 할아버지와 김기희 할머니 집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끊이지 않았다. 캐낸 삼 껍질을 깎는 백삼 작업에 여성들이 서로 달려들었다. 할아버지네 집은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이 든 할머니들이 일하기 수월하게 도와주었으며 심지어 젖먹이 어린아이를 가진 아낙들에게도 일거리를 주었다.
다른 집에서는 노인들이나 애가 딸린 부인들은 받지를 않았다. 할머니들은 손에 힘이 부족하여 인삼 형태가 얽혀 있는 것은 깎기가 어려웠다. 그런 것을 '악바리'라고 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그 '악바리'들을 일하러 온 할머니들에게서 덜어주는 대신에 사람을 더 썼다.
"악바리 몇 개씩만 덜어내도 할머니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나중에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많이 얻었던 모양이야."
그렇게 오랜 세월 쌓인 할아버지네 인심은 선거에서 표로 나타났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1972년 12월, 당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도전한 적이 있다. 이때 2명을 뽑는 강화읍에서는 5명의 후보가 나섰는데 여기서 홍순주 할아버지가 최다 득표를 했다.
1976년 발간된 '강화사'에 따르면 당시 선거에서 홍순주 할아버지는 강화읍 투표자 7천948명 중 2천212표를 획득해 2위 당선자(1천742표)와의 표차가 500표 가까이나 되었다.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이 다들 강화 토박이였는데 홍순주 할아버지만 외지인이어서 선거운동이 더욱 힘이 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강화지역에서 여러 가지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할아버지는 또 강화지역 젊은이들의 결혼식 주례를 도맡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주례 선 것만 여태 1천 쌍이 넘는다고 했다.
홍순주 할아버지와 김기희 할머니 부부가 말하는 백삼 깎는 장면은 개성이 고향인 소설가 박완서의 회고에서 그대로 펼쳐진다. 박완서의 산문집 '두부'에는 고향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속에 백삼 깎는 장면이 생생하다. '수매한 인삼을 백삼으로 만들려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때가 가정부인들이 빈부나 지체를 가리지 않고 부업에 나서는 때이다. 조합 너른 마당에 큰 맷방석에다 인삼을 산처럼 쌓아놓고 여자들이 둘러앉아 대나무칼로 인삼 껍질을 벗긴다. 한 맷방석에 아홉 명, 열 명 혹은 열한 명씩 둘러앉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삼은 비싸게 거래되었다. 그만큼 도둑도 많이 끓었다. 홍순주 할아버지 역시 도둑을 많이 맞았다고 했다. 인삼이 4년근이 지나면서 각 삼포마다 관리자를 내세워 야간 순찰도 돌고 하는데도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인삼 밀매도 오래된 이야기이다. 조선 말에는 인삼밀매범의 목을 쳐 내걸기도 했다. 1866년 8월, 개성에서 몰래 인삼을 매매한 2명이 붙잡혔는데 이들은 서울로 압송돼 즉시 효수되었다.
1933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홍삼 밀매범 인천에서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는데, 강화에 사는 사람이 홍삼 35개를 갖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려다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인삼이 국가적으로 귀하게 다루어졌다는 얘기다.
1894년부터 1897년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의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속에는 당시 인삼이 조선에 얼마나 중요한 재화였는지가 자세히도 그려진다.
'인삼은 한국의 수출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또한 세입의 중요한 원천이다. 내가 제물포를 떠날 때 탔던 증기선에서는 14만 달러 어치의 인삼을 위탁 판매하고 있었다.'
개성인삼의 강화도 전파자 홍순주 할아버지의 집 거실에는 30년 넘은 인삼주가 몇 병 있다. 커다란 술병 속에 담긴 오래되고 잘 생긴 인삼들이 홍순주 할아버지와 김기희 할머니의 인삼에 얽힌 이야기에 곰삭은 맛을 더해주는 듯싶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바로잡습니다
지난 1일자에서 보도한 '실향민 이야기-홍순주 할아버지' 상편 기사와 관련, 홍순주 할아버지의 이름이 취재 기자의 잘못으로 인하여 '황순주' 할아버지로 다르게 나갔습니다. 홍순주 할아버지와 가족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