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하대학교 1천여명 학생들
경찰 피해 여러갈래 나뉘어 집결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호헌철폐
국민대회' 노동자등 수만명 모여
법인택시들 경적 울리며 집회 동참
주변 상인들도 박수 치며 '응원'
민주주의 염원 '분노' 커진 시민들
시장·대우車공장까지 끝모를 행렬
경찰 곤봉 휘두르며 강경진압
최루탄에 뿌연 거리… 부상 속출
더 많은 인파 이어지는 시위들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선언 이끌어

그리고 시민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같은달 29일 '대통령 직선제' 라는 민주주의의 기념비적인 성과물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시민들의 사회적, 정치적 각성과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6·10 민주항쟁은 30년이 지나 촛불로 이어졌다.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당시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격정의 6월을 재현해 보았다.
![[이슈&스토리]6·10 민주항쟁-1987 년 그날의 인천, 재구성](https://wimg.kyeongin.com/news/legacy/file/201706/20170608010002384_3.jpg)
1987년 6월 10일 오후 4시. 인하대학교에 1천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날 학생들은 오후 6시에 부평역에서 열릴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의 출정식을 가졌다.
그 해 1월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학생을 연행한 뒤 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짓밟은 '4·13 호헌조치' 등으로 정권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총학생회 등을 중심으로 모인 학생들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인하대 후문으로 나아갔고, 경찰은 이를 막아섰다. 학생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부평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경찰과의 대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학교에 모였던 1천여 명의 학생들은 부평역에서 만났다.
국민대회가 열린 오후 6시. 운행중이던 택시기사들이 동시에 경적을 울리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경적 시위'는 개인택시 보다는 법인 택시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 개인택시를 운영했던 김풍수(72)씨는 "당시 인천에 택시법인이 50여개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부에 항의하기 위한 경적 시위는 법인 택시들 주도로 진행했다"며 "개인택시는 많이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 나도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부평역에는 인하대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대학생, 인근 주안·부평 공단의 노동자 등 수 만명이 모였다. 행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주변의 상인들은 박수를 치면서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경원세기 해고노동자였던 신승식(56)씨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연초에 터졌고, 4·13호헌조치 발표로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의 분노가 커졌다"며 "인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인원이 모였다. 부평역에서 부평시장과 대우자동차 공장까지 인파가 이어졌으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대학생들은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인하대학교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맡아서 집회 참여를 주도했던 조두국(53)씨는 "당시 집회에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었다"며 "시험기간이었지만 교수님들은 시국선언을 했었고 학생들을 응원하며,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말했다.
학생, 노동자 등이 대규모로 모인 거리를 경찰은 강경하게 진압하려 했고, 최루탄이 난무했다. 전날 서울에서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고 병원으로 실려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으로 거리는 뿌연 연기로 물들었고, 경찰은 곤봉을 휘둘러 댔다.
신승식씨는 "그 시기의 집회는 몇 명이 모이든 경찰은 무조건 강경 진압했다"며 "나도 당시에 왼쪽 다리에 최루탄을 맞았다. 경찰이 곤봉 등 무기를 사용해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은 일상적인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6월 10일 이후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인하대는 6월 10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학내 집회를 열었고, 점차 참여하는 학생의 수가 늘어갔다.
조두국씨는 "6월 15일로 기억한다. 인하대 학생 1만명이 거리로 나서기 위해 학교에 모였다"며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운동장이 꽉 찼다"고 말했다.
6월 18일에는 '전국 최루탄 추방대회'가 부평과 동인천 일대에서 열리는 등 지속적으로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그 결과 6월29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이 발표됐다.
1987년 6월 10일. 인천을 비롯해 전국의 시민들이 '독재타도'를 외친 그날은 20년이 지난 2007년에 '6·10 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됐다. 30년이 되는 올해에는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고,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30년 전 거리로 나섰던 이들은 6월 항쟁의 연장선에 지금의 촛불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임병구 인천시교육청 정책기획관도 30년 전 6월 거리에 있었다. 임병구 기획관은 "1960년 4·19혁명부터 1980년 5·18, 1987년까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열망은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두국씨는 "우리나라에서 시민들이 나섰던 4·19 때는 군사쿠데타인 5·16이 발생했고, 1980년 광주는 군홧발에 짓밟혔다. 1987년 6월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지만 신군부가 재집권했다"며 "이번 촛불은 그 성과가 이전보다 클 뿐 아니라 노동자, 학생 등 일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주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른 점"이라고 했다.
1987년 당시 노동자로서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박인숙(54·여)씨는 "6월항쟁으로 이룬 절차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있었기에 촛불의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