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형 '오타후쿠 솜공장'
새 일자리 인천 젊은층 몰려
현재 남구 숭의동 일대 위치
인천서 사다 준 농구화 추억
■둘째형 '이북장사·인삼농사'
4명의 형 중 가장 잊지 못해
돈 벌어 중·고·대학 보내고
강화 정착도 도와 고마움 커
■셋째형 '고려정미소'
일본이 세운 정미업 시작점
아마 권투 전국대회 우승자
구락부 운영 친선전도 주선
■용산동 용수산 밑자락 고향 마을은?
결혼식 풍경 이색… 손님마다 상 하나씩 내놔
부인 김기희 할머니 개성보쌈김치 솜씨 자랑
35m폭포 돌 던져 넘긴 실력 투수이력 밑바탕
홍순주 할아버지는 첫째 형이 해방 전에 인천의 '오타후쿠와타'에서 일했다고 했다. 일본어 '와타(わた)'가 솜이나 목화를 뜻하니 솜 공장이다. 또 둘째 형은 전쟁 직후 강화에서 '이북장사'를 하고 인삼 농사를 지었다. 셋째는 해방 전 '고려정미소'에서 일하면서 권투를 했다고 했다.
이는 당시 새로운 일자리가 넘쳐나던 인천에 개성과 같은 대도시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첫째 형(홍순경)이 일했다는 '오타후쿠' 솜공장은 할아버지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그 상징마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예전에는 유명했던 모양인데, 지금 그와 관련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 스치듯 언급돼 있고, 당시 신문 기사 몇 꼭지가 보일 뿐이다.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에 따르면, '오타후쿠'의 정식 명칭은 '오타후쿠 면(綿) 주식회사 조선공장'이다.
이곳은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정회원은 아니었다. 아마도 일본에 본사를 두고 인천에 한반도 진출 거점으로 마련한 지점 성격이어서 회원사 자격은 얻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도 세금은 꽤 많이 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공장의 규모는 당시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동아일보' 1935년 4월 16일자에는 '인천 면(綿) 공장 17일 기공'이란 제목 아래 ''오다후구' 솜 공장이 인천부외 장의리(仁川府外 長意里)에 설치된다'는 단신기사가 실렸다.
역시 같은 신문 1935년 8월 17일자는 '오다후구' 면 공장이 9월 초부터 본격영업을 시작할 것과 공립 직업소개소에서 15세부터 22세 사이의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직공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이듬해인 1936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이 공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 공장이 전소됐음을 보도했다.
기사는 여직공이 250명가량이었으며, 대개가 12~13세 처녀들로 이들은 직장 잃은 설움에 방성통곡하며 길을 헤매고 있다고 전했다. 또 '동아일보' 1937년 12월 8일자에는 12월 6일 오후 1시 20분경 부내 대화정 '오다후구' 솜 공장에서 불이 나, 10여 분 만에 진화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오타후쿠' 솜 공장과 관련한 이들 몇 안 되는 신문기사는 기사의 양은 적지만 참 많은 것을 보여준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에 불과한 어린 여자 아이들이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또는 집안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솜 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뿌연 먼지 속에서 일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오다후구' 솜 공장은 인천 '장의리'에 있다가 큰불이 난 뒤 '대화정'으로 주소를 이전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동네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향토사가 이훈익(1916~2002) 선생의 '인천지명고(仁川地名考)'에 따르면, 장의리(長意里)는 지금 남구 숭의동 일대로 일제 강제병합 이전에는 '장천리(長川里)'였다.
이것이 1906년에 장천리, 여의리(如意里), 독각리(獨脚里)로 나뉘었다가 1937년 1월 15일자로 대화정(大和町)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숭의동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1일부터 써왔다. '대화정'은 일제가 서울의 필동을 비롯한 전국 여러 도시의 마을에 붙인 특색 없는 지명 중 하나이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큰형이 이 '오타후쿠' 솜 공장에서 경리 업무를 맡았다고 기억했다. 큰형은 이 공장의 여직공과 결혼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개성중학교 3학년 때 큰형이 인천에서 사다 준 농구화를 신고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개성에서는 그런 신식 농구화를 구할 수가 없어서 친구들이 그 신발만 보아도 다들 기가 질릴 정도였다고 한다.
셋째 형(홍순일) 역시 인천 입장에서 큰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일제 강점기 인천 경제의 동력이었던 정미업계에 종사했다. 셋째 형이 다닌 곳은 '고려정미소'였다. 형은 또 권투 실력이 뛰어났다고 할아버지는 회고했다. 아마추어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
1940년대 초반 서울의 시공관에서 결승전이 펼쳐졌는데 함흥 출신 선수와 맞붙어 우승을 차지해 조선선수권 보유자가 되었다고 했다. 한반도 최고 실력의 셋째 형은 정미소에 다니면서 인천에서 권투구락부(클럽)도 직접 운영했다고 했다.
셋째 형은 젊을 때인 한국전쟁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에 인천 권투구락부 선수들을 개성으로 데리고 와서 개성의 권투구락부 소속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던 기억도 난다고 했다.
셋째 형이 다니던 '고려정미소'는 일제 강제병합 이전에 일본이 세웠으며 인천 정미업계의 시작점에 위치한다. 해방 이전에는 설립자 리키타케 헤이하치(力武平八)의 이름을 따서 '리키타케(力武)정미소'였다. 나중에 동생인 리키타케 카지로(力武嘉次郞)가 뒤를 이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1904년 8월 설립한 리키타케정미소는 1930년 기준으로 정미 기계를 29대나 들여 놓아 하루 처리 능력이 현미 500석, 정미 1천600석이나 되었다. 당시 인천의 16곳 정미소 중 최대 규모였다.
1914년 동생이 넘겨받은 뒤에 방화에 의한 정미소 화재로 위치를 중구 사동에서 신흥동으로 옮겼다. 인천에 와 있던 일본인들이 1933년에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정미소가 몇 곳 안 되던 인천의 정미업은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 일본인이 늘어나고 만주 방면으로의 판로가 개척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인천의 정미업계에서 '리키타케정미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리키타케정미소는 최소한 1933년 이전에 리키타케물산주식회사(力武物産株式會社)로 업종을 확대했던 듯하다. 그 한복판에 홍순주 할아버지의 셋째 형이 있었다. 인천시립도서관인 율목도서관이 리키타케의 별장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고려정미소라고 바꿨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4명의 형 중 나이가 열두 살이나 많은 둘째 형님을 잊지 못한다. 개성에서 지물포 같은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냈고, 강화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정착하도록 도와줬기 때문이다. 부친을 어릴 적에 여읜 할아버지에게는 마치 아버지 같은 존재다. 그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개성 용산동에서 태어났다. 용수산 밑자락의 마을이다. 개성의 풍습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느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결혼식 풍경을 꼽았다. 잔치가 벌어지는 신랑 집에 찾아오는 손님마다 한 사람에 상을 하나씩 차려냈다고 했다.
잔칫상이나 그릇을 전문적으로 빌려주는 가게가 있을 정도로 상이나 그릇이 많이 필요했다. 당시는 거지들이 득실거릴 때인데, 거지들이 와도 하객처럼 사람마다 상을 따로 내줘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잔칫집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 집에서는 미리 손을 써서 거지 떼의 점령을 막았다고 한다. 개성의 거지왕 이름을 돈을 주고 빌리는 방법이었다. '김헌영', 그때의 거지왕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이름을 크게 써서 대문 밖에 붙여 놓으니 정말로 거짓말같이 거지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더 늦기 전에 젊은이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결혼 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솜씨를 '둘째 동서'를 통해서 전수받을 수밖에 없었던 개성보쌈김치 만드는 법이다.
지금 생각해도 개성보쌈김치는 참으로 특이하다. 배추부터가 다르다. 몸통이 길쭉한 개성 배추가 따로 있었다. 그걸 옆으로 여러 토막으로 잘라내서는 갖은 양념을 넣는다. 들어가는 양념이 많아 전문가가 해도 하루에 50개밖에 쌈을 만들지 못할 정도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홍순주 할아버지의 기억력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싶을 만큼 뛰어났다. 할아버지는 개성의 중경(中京)소학교를 나왔는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리 반장을 했다고 했다.
그게 다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으로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입학하자마자 선생님이 기억력 테스트를 했는데 거기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나았던지 생각하지도 않은 반장이 됐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개성의 이곳저곳 생각나지 않는 곳이 없다. 중학생 시절에는 개성에서 60리가량 떨어진 천마산 줄기의 대흥산성 북문 박연폭포까지 소풍을 가고는 했다. 물줄기 높이가 35m 정도 되는데 폭포 밑에서 위로 돌멩이를 던져 폭포를 넘기는 학생은 할아버지가 유일했다고 한다.
개성사범학교(6년제 개성중학교 본과)에서 야구팀 투수를 맡았던 것도 이런 이력에서 출발한다. 개성사범학교는 1946년 경기도립으로 세워졌다.
전쟁을 겪으며 학교가 피란해 1952년 국립 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2003년에 다시 인천교대에서 경인교대로 바꿨다. 개성사범 동기 중에는 인천교대 부속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친구가 아직도 인천에 살고 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그동안 두 차례 정도 개성 관광을 시도했는데 실제로 갈 수는 없었다. 더 늙기 전에 개성을 한 번 다녀왔으면 하는 게 홍순주 할아버지의 소원이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