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엔스토리 강화산성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길이가 7.1㎞에 이르며 4대문, 암문, 수문 그리고 북장대, 남장대를 비롯한 장대가 있다. 사진은 남장대. /경인일보 DB

전시 수도서 문학·예술등 꽃피워
고려 왕릉, 세계유산 등재 추진중
대장경 등 풀어야 할 숙제도 많아
경주·부여 같은 '古都' 야심찬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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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고려 때였다. 1232년 몽골의 침략을 받은 고려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39년간 강화도는 고려의 전시(戰時) 수도가 됐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팔만대장경이나 금속활자 같은 민족문화의 정수가 강화에서 여전히 찬란히 빛났으며 고려의 문학과 사상, 예술이 강화에서 꽃을 피웠다. 강도(江都) 시대라 불린 이 기간 한반도 역사, 문화, 정치, 사회의 중심은 강화였다.

남한 내에서 이런 고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강화도가 유일하다. 인천시가 추진하고 있는 '강도(江都) 복원 프로젝트'는 남한 내에서 유일하게 강화도에 남아있는 고려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시켜 강화를 경주나 부여 같은 '고도(古都)'로 자리매김시키겠다는 인천의 야심찬 계획을 담고 있다.

이슈엔스토리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강화 관방유적 용두돈대 . /경인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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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왜 강화도를 택했을까

고려 무신정권이 강화로 수도를 옮긴 가장 큰 이유는 해전에 약한 몽골과의 싸움에서 난공불락의 요새인 강화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전략적 측면이 있었다. 여기에 고려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화 천도(遷都)를 단행했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는 1196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가 시작됐다. 최충헌은 강력한 사병조직을 키워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젊고 유능한 군인은 최씨 정권의 사병이 됐고 늙고 나약한 군인들만 중앙군으로 편입됐다.

최씨 집안은 정권을 유지하고자 사병조직을 양성했는데, 이 때문에 국가는 정작 몽골 등 외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이 없었다. 고려 지배층이 사실상 정권 유지를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전쟁은 장기화 됐고, 몽골은 전국 곳곳에서 약탈, 파괴, 방화 등을 일삼았다.

강화 천도가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은 1232년 2월이었다. 1차 여·몽전쟁이 끝나고 몽골군이 철수한 직후였다. 1232년 6월 천도가 결정된 후 국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 등 수십만 명의 개경 사람들이 강화도로 이주했고, 이에 따른 궁궐, 관청 주거시설들이 강화도에 속속 들어찼다. 수도를 방비할 대규모 성곽 공사도 이 시기에 진행됐다.

이슈엔스토리 강화산성 서문
강화산성 서문. /경인일보 DB

#남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 왕릉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현재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이다.

강화에는 석릉(碩陵·사적369호), 홍릉(洪陵·사적224호), 곤릉(坤陵·사적 371호), 가릉(嘉陵·사적370호) 등 4기의 왕릉이 있다. 신라시대 왕릉이 대부분 평지에 만들어진 것과 달리 고려의 왕릉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곳이 많다.

고려 사람들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자리를 명당으로 여겼는데 무덤의 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물이 흐르는 지역을 명당으로 꼽았다고 한다.

강화에 있는 고려 왕릉 중 석릉은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묘다. 희종은 재위 기간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이유로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다. 희종은 이후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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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궁지 승평문. 현재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관청인 강화유수부 동헌과 부속건물들만 남아있어 고려 때 궁궐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고려 궁궐의 정확한 위치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야 할 과제다. /인천시 제공

홍릉은 고려 23대 왕인 고종의 묘로 고려산 중턱에 있다. 고종은 어렸을 때 강화로 유배와 생활을 했고 왕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전시 수도였던 강화에서 평생을 보냈다.

양도면 길정리에 있는 곤릉은 22대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묘로 원덕태후 역시 강종과 함께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강화도로 천도한 뒤 강화에서 생활했다. 가릉은 24대 원종의 비인 순경태후의 묘다. 고려가 수도를 강화로 옮긴 지 4년째인 1236년에 승하해 강화 진강산에 묻혔다.

인천시는 강화에 모여 있는 고려 왕릉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유적지구'는 이미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고려'를 매개로 한 남북 학술교류도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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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정수사(淨水寺) 대웅보전. 보문사, 전등사와 함께 강화의 3대 고찰 중 하나다. 639년(신라 선덕여왕 8년) 창건했다. /인천시 제공

#고려 문화 정수 고려대장경과 금속활자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정수라 불리는 고려대장경과 금속활자는 강화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고려대장경은 고려가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시기 가운데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 동안 제작됐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불경을 조판한 이유는 불력(佛力)으로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고려가 처음 만든 대장경은 1011년(현종 2년)부터 1087년(선종 4년)까지 조판한 '초조(初雕)대장경'이다. 당시 거란족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바람으로 만들었다. 초조대장경판은 1231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조판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려대장경이며, '재조(再雕)대장경'으로도 부른다.

고려의 전시수도 강화에서 두 번째 대장경을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판각했는지, 또 보관은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확정하는 일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과 관련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국이상국집'에서 전하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이다. 강화에서 금속활자로 새겨 1234~1241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직지심체요절'보다도 약 140년 앞섰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인천시는 강화도와 연관이 깊은 이런 기록 유산 관련 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할 수 있는 '강화 세계기록유산 자료관'을 2022년까지 건립할 예정이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