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양준혁 등 강타자들 단골

긴장해 몸이 굳은 투수의 공은 한가운데를 향해 밋밋하게 날아가고, 한껏 노리고 있던 타자의 배트에 정확히 맞아 총알같이 투수 곁을 스쳐 날아간다. 모든 일이 공격팀의 기대와 수비팀의 우려대로 흘러가는, 어쩌면 한 경기의 승부 자체가 성큼 움직이는 순간.
하지만 1루 주자의 움직임을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2루수는 정확히 2루 베이스 위에서 타구를 잡아내고 한쪽 다리를 뻗어 2루 베이스를 밟은 다음, 다시 몸을 돌려 이미 2루 베이스 앞까지 달려와 있던 1루 주자의 몸을 태그한다.
직선타를 잡는 순간 타자를, 2루 베이스를 밟는 순간 이미 3루를 향한 2루 주자를, 다시 달려오던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2루수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1루 주자의 몸을 태그하는 순간 1루 주자를 잡아낸 세 개의 아웃카운트. 공격팀 더그아웃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리고, 굳어있던 수비팀 더그아웃에 슬며시 웃음기가 흐른다.
2007년 6월 13일, 삼성 라이온즈 3, 4번 양준혁과 심정수를 2루와 1루에 놓고 5번 박진만의 정확한 타구를 잡아내 분위기를 극적으로 뒤집어낸 기아 2루수 손지환의 '무보살 삼중살' 상황이다.
축구장에 '골대 세 번 맞히고 이기는 경기 없다'는 속설이 있듯 야구장엔 '병살타 세 개 치고 이기는 경기 없다'는 말이 있다. 병살타는 말 그대로 공격팀의 재앙이며 수비팀의 환상이다. 하지만 병살타는 모호하고 역설적인 구석이 있다.
병살타란 대개 좋은 기회와 좋은 타구가 만나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다. 어지간히 잘 맞지 않은 타구는 두 명의 주자를 잡을 만한 시간을 벌어주지 못하며, 주자가 없거나 2사를 당한 뒤처럼 '기회'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병살타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병살타를 줄이기 위한 타격훈련'을 할 수도 없다. 병살타란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피해가려다 보면 오히려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산 병살타 부문 맨 위쪽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는 것은 안경현, 마해영, 양준혁, 이만수, 김한수 같은 전설적인 강타자들이다. 그리고 해마다 팀 병살타 상위권을 채우는 팀들 역시 가을야구 단골팀들이다. 그래서 병살타라는 사건을 놓고 강자와 약자를 가려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터져 나온 다음의 상황이다.
두세 번쯤 적시타가 아닌 병살타로 누상이 깨끗이 청소된 다음 순간마다 타자들이 '어차피 나간다고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홈런 스윙으로 일관하는 팀과 지독한 불운을 상대로 '네가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보자'는 집념으로 또다시 집요하게 공을 고르고 안타를 쳐서 한 발 한 발 치밀하게 1루를 노리는 팀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경기를 하다 보면 아무리 잘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돌발변수가 병살타라면 그것에 마음 휘둘리지 않고 차근차근 그 다음 기회를 만들어가는 단단한 의지야말로 진정한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흔한 말과 다르게 땀과 노력은 종종 사람을 배신한다. 스포츠가 도박과 달라봤자 '기칠운삼(技七運三)'이냐 '운칠기삼(運七技三)'이냐의 문제라는 말에도 진실이 있고, '기(技)'라는 것 또한 노력만이 아니라 '재능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운'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불운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것은 노력의 절대적 양이라는 점에 야구의 매력이 있고 인생의 공정함이 있다.
야구의 여러 요소가 삶의 여러 구석을 은유한다면, 병살타는 행운과 성공 사이사이에 매복하고 있는 불운을 상징한다. 그리고 병살타 직후의 타석에서도 공 한 개를 골라내는 데 전념하는 타자의 승부는 집요한 불운 속에서도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한 근거가 된다.
/김은식 야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