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인상이 아주 좋은 관리인이 로비에 서성거려 '소파에 앉아 이야기나 나누자’고 하자 머뭇거리다 자리에 앉 길래 대뜸 남쪽사람과 얘기하면 지적 받는냐고 물었더니 “일 없습니다”라고 하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필자가 북한에 관심이 많아 대성동 마을에도 가봤다고 말하자 자기도 군대생활을 대성동에서 하였다며 빙긋이 웃는다. 이름을 물었더니 전주 이씨, 권세 권, 영화 영자라고 하고는 전주가 전라남도이냐고 물어 전라북도라고 말해 주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안내원이 왔다.

오늘 저녁에 전기만 나가지 않으면 남으로 갈 컨테이너 선적이 완료되고 내일 오전에는 남쪽으로 떠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오늘 저녁에 남측에서 한잔 사라고 해 예측 한데로하고 생각하며 저녁은 우리가 내기로 했다.

그런데 농담인지 필자에게 “남쪽에 있는 우선생부인께서 북측에서 우선생을 무사히 내려보낼까 하고 걱정하지나 않을 까요”하고 안내원중 나이가 많은 김선생이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을 것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왜 그런한 말을 했는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저녁 시간이 됐다. 털게로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김정일장군을 추켜세우기 위해 이런 사례를 들었다. 압록강하류에 삼각 지대의 섬이 있는데 비가 많이 와 물이 불어나 이 지역 주민이 고립돼 위험하게 되자 김정일장군께서 헬리콥터를 띄워 구했다는 자랑을 하였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하기로 했다. 보릿고시절부터 자가용을 굴리는 시대,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서도 설명했더니 조용해 졌다. 자동차로 시내관광을 제의했더니 규정상 어려우나 토론을 한번 해 보겠다고 긍정적답변을 주었다.

3월20일이 밝았다. 유난히도 화창한 봄날이었으며 대동강물은 더욱 반짝이며 서해로 흘러가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어젯밤에 선적이 끝났느냐고 물었더니 벌써 배가 출항대기선에 나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한동안 시내관광하자는 말을 기다렸으나 다른 말만 계속한다. 잠시후 선착장으로 안내돼 보트를 타고 안내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끝내 시내관광은 못한 채 타고 왔던 소나호에 몸을 실었다.

▲소나호의 미얀마선원들이 본 한국, 한국인은
오후 1시20분 남포항을 출발해 서해갑문으로 향하던 중 도선사와는 입항할 때 안변이 있었고 인상도 구수하게 생겨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 보았다. 남포시의 뒷산을 보니 나무가 너무없는 것 같다고 했더니 소나무가 별 쓸모없어 수종을 바꾸는 중이라고 했다.

도산사는 서해갑문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인천항이 남포항보다 규모가 크지요하며 선장에게 인천항 지도를 보자고 한다.

지도를 같이 보며 인천항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을 나누다 지도에 맥아더장군 동상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김일성수령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동족간에 전쟁을 일으킨 자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말씀하셨다고 소개한다. 북쪽에서는 6.25를 확실히 북침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4시10분 서해갑문을 통과했다. 미얀마 국적의 선원들이 몰려와 남포생활이 즐거웠느냐고 질문을 한다. 비록 즐겁지는 못했지만 즐거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아는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집과 직원들에게 안부전화를 한후 잠을 청했다. 남포를 떠난지 만 하루가 돼 오후 2시30분 인천항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파도를 넘어 어렵게 다녀온 남포 출장 길(북한 여행 길)
3박4일동안 북쪽에서 지내며 북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잦은 정전, 주민들의 무표정, 썰렁한 항구등은 사정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을 같은 동포라고 말하기에는 50년간 따로 살아왔기에 생각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그러나 언젠가는 합쳐야 한다는 대명제앞에는 이의는 없었다. 다만 어떤 모습으로 합쳐야 할지는 각자의 노력에 달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