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안 나가면 벌금 물려

흔히 벤치클리어링(Bench-clearing brawl)은 '패싸움'과 같은 말로 이해되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대개의 벤치클리어링은 반대로 '싸움 말리기'의 성격을 가진다.
야구는 공이나 배트, 혹은 스파이크 등을 통해 다른 선수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선수들은 늘 그라운드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긴장된 상황 속에서 빈볼이나 위협구, 혹은 위험한 슬라이딩이나 자극적인 욕설 같은 사건이 돌출하면 종종 선수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경우 소속팀 동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팀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동시에 경기에서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아주 세심한 방식으로 그 갈등 상황에서 자기 팀 선수에 대한 지지의 뜻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그라운드로 달려나가 여러 사람의 몸으로 갈등 상황을 무마하는 동시에 자기 팀의 위세와 단합을 과시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이 벌어질 때 함께 달려나가지 않는 선수는 이기적인 선수로 찍히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그런 이기적인 선수들에게 벌금을 물리기까지 하는 것은 벤치클리어링이 '동료를 보호하고, 팀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행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벤치클리어링이 의례적인 과시 행위 정도가 아니라 정말 '패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평소 두 팀 사이에 집단적인 대결의식이나 분노가 고조되어 있는 경우, 혹은 미처 말리고 보호할 틈도 없이 치명적인 공격이 감행되어 버린 경우에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
1990년 6월 5일 잠실구장에서 OB와 삼성 선수들이 충돌했던 사건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벤치클리어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날 7회 초 OB 투수 김진규가 타석의 강기웅에게 빈볼성 초구를 던진 데 이어 기어이 2구로 몸을 맞히자 강기웅이 손에 배트를 쥔 채 김진규에게 달려들면서 벤치클리어링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라운드로 쏟아져나온 동료 선수들은 강기웅과 김진규 사이의 몸싸움을 말리는 대신 주먹과 발길질을 보태기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집단 난투극이 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80년대 내내 관통해온 두 팀 삼성과 OB의 라이벌 의식, 그리고 강기웅이 자신의 영남대 2년 후배인 김진규가 의식적으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는 배신감 때문에 스파이크 날을 세운 채 옆구리를 강타하는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날 몸싸움의 격렬함은 무려 22분간이나 이어졌으며, 그 난투극을 말리려고 고군분투하던 주심 김동앙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맞아 갈비뼈 골절상을 입을 정도였다. 그 결과 두 당사자인 강기웅과 김진규 외에도 OB의 조범현, 김태형, 삼성의 박정환, 김종갑 등 모두 여섯 명의 선수가 퇴장당하고 다시 삼성의 강기웅과 이복근은 경찰서에 형사입건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대개의 벤치클리어링은 격렬한 패싸움으로까지 비화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야구판이 좁은 바닥이기 때문'이다.
50개 남짓한 고등학교, 그 중에서도 명문으로 불리는 십여 개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이제 많이 늘었다고 해봐야 10개 밖에 안 되는 프로구단을 거치면서 서로 촘촘한 선후배 관계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팀에서 한솥밥을 먹게 될지 모르는 한국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서로를 향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