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 명제세 선생 임시정부서 맹활약
1919년 3·1운동 직후 2차 '만세운동' 추진
강화도 출신인 유경근·윤종석과도 연결돼
1920년대 조만식과 국산품애용운동 전개
초대 심계원장 역임·전쟁 직후 납북 당해
아버지 명제영 목사 영변교회 전도사 활동
당시 담당 목사가 이후 강화 잠두교회 부임
이동휘·조봉암이 다니던 곳… 민족애 영향
아들 명창식 "후세에서 오래 기억됐으면…"
할아버지의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명제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1910년대 초반 중국 톈진(天津)에서 무역상을 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무렵 톈진에서는 조선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이 결성됐는데, 명제세는 부단장으로 참여해 단장까지 지냈다.
불변단은 결성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외곽단체로 편제돼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임시정부 '특파원' 역할을 했다.
명제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9월 톈진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임시정부로부터 서울에서 강화도 사람들이 자주 묵는 '조선여관'에서 지내면서 강화도 출신 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과 시위운동을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유경근은 1905년 강화도 자택에 광창학교를 설립한 교육운동가이기도 했고, 잠두교회 분회를 지어 헌납한 종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진 못했다. 유경근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 활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뒤였기 때문이다.
대동단원이자 세브란스의학교 3학년 학생이던 강화도 출신 윤종석(尹鍾奭·1896~1927)도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6권에 실린 윤종석의 당시 심문조서에 이 같은 명제세와 유경근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명제세는 이듬해까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주요 간부를 잃은 불변단은 해산됐다. 불변단이 사라진 뒤 톈진에는 여러 조선인 단체가 생겼다.
그중 하나가 사회주의 계열의 '고려국민회'다. 이는 강화도에서 민족계몽운동을 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한 이동휘(李東輝·1873~1935)가 지원한 단체였다고 한다.
명제세는 1920년대 초중반에는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해 국산품애용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큰아버지는 양복을 절대 안 입었고, 늘 선비처럼 길게 수염을 기른 채 하얀 한복만 고집하셨어. 겉보기와는 다르게 고지식하지 않고 호탕한 성격이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어.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와해된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까지 명제세 선생의 행적은 당시 신문이나 자료를 통해 찾아보기 어렵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요시찰 인물로 지정돼 본인은 물론 우리 가족까지 일본 형사가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며 "영변에 탄광이 많은데, 해방될 때까지 탄광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에는 월남해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결성을 주도한 정치조직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남한 정부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명제세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감사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5월 북한 당국에 의해 고향 영변에서 쫓겨나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
큰아버지가 장관급인 심계원장에 오르면서 현 서울역 옆에 있던 중앙청(1996년 철거) 인근에 관사가 제공됐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도 심계원장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머지않아 노량진에 집을 얻어 독립했다.
"큰아버지는 심계원 공무원들한테 출근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라고 지시했어. 감사업무를 하는 공무원이니까 외부에 나가서 밥 얻어먹지 말라는 뜻이거든. 너무 강직하셔서 아랫사람들한테는 영 인기가 없었지."
명제세 선생은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서울을 지키다가 납북됐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명제세의 아들이 김성칠을 찾아온 장면이 나온다.
1950년 8월 6일 일기를 보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의 납북에 대해 "정부는 부통령도 내버리고 외국사신들에게까지 충분한 연락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하는 판"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가) '40년 동안 일제의 몹쓸 착취와 닦달을 받고 나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가엾은 조선 사람들이 아닌가. 피차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어야지. 서로 칼부림질해서 함께 넘어져 죽을 까닭이 무엇이 있나'라고 하시며 순순히 포박을 받으셨다"고 말했다고 김성칠은 기록했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는 평북 영변에 살던 시절 감리교 영변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당시 백학신(白學信·1899~?) 목사가 영변교회를 담당했다고 한다.
평북 용천 출신인 백학신 목사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영변교회 주관자로 있다가 1948년 강화도로 부임했다. 1949년부터는 잠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서 전한다.
백학신 목사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1950년 9월 말 강화도를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납북됐다.
1900년 설립된 잠두교회는 이동휘가 초창기 교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은 독립신문 기자 출신 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같은 걸출한 인물이 담임목사를 맡았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도 어릴 적 잠두교회를 다녔다. 소설가 이원규가 쓴 '조봉암 평전'에서는 이동휘가 강조한 신앙을 통한 구국투쟁이 잠두교회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이 같은 배경을 가진 교회를 다닌 어린 조봉암이 민족애와 조국애를 생각하게 됐을 거라고 했다.
죽산 조봉암은 1919년 3월 18일 강화읍에서 열린 '강화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같은 해 4월 중순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약 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평생 모은 할아버지 집안과 감리교회의 역사 관련 자료를 살필 정도로 배움의 열정이 남다르다.
명창식 할아버지를 세 번째 찾아간 지난 5일 오전 인천 남구 감리교 원로원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돋보기안경을 쓴 할아버지는 인천지구 평북도민회가 1997년 펴낸 '평안북도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취재기자에게 설명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가져온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큰아버지 명제세에 관한 대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인터뷰에 동석한 막내아들에게 "당장 책을 주문해달라"고도 했다.
실향민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영변에 대한, 집안에 대한 자료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룬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기억은 잊히겠지만, 자료는 오랜 시간 남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1990년 감리교 원로원에 입주하면서 인천과 첫 인연을 맺었다. 스스로 그 이전까지는 인천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삶과 삶에 얽힌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니 인천의 이야기와도 연결 지어졌다.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실향민 1세대의 이야기를 모으는 게 중요한 이유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옛날에 만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이젠 몇 사람 남지 않았다"며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후세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거기서 새로운 걸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