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제대금으로 좌판 3개 사 50년째 장사
1930년대 조성 정식명칭은 송현 자유시장
철거 후 다시 재건 미군 물건 팔면서 '명성'
군복 자체가 패션이던 시절 가장 많이 팔려
당시 한달 수익이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
군복 염색 안하고 팔면 '불법' 벌금 물기도
부대물건 줄어 미제 청바지 등 수입품 대체
의류산업 발전 등으로 쇠퇴… 명맥만 유지
인천 동구가 행정 명칭으로 정한 이름은 '송현 자유시장'이다. 양키시장은 1930년대에 조성됐다가 철거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골목을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춘화 할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이곳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직업 군인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서울 청량리 '태창방직' 공장에 다녔다. 결혼 뒤에는 남편 근무지를 따라 강원도 춘천 등지에서 살았다.
1966년께 남편은 대위로 제대를 했는데 제대금이 15만원이었다. 당시 15만원이면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양키시장의 좌판 3개를 샀다. 당시 집안 식구들이 인천 동구에 살아 양키시장과 인연이 닿았다.
양키시장은 주식회사 형태로 돼 있어 회사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좌판 계약을 했다. 가게 이름은 '은영사'로 정했다. 인천 동구 화평동에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옷 장사를 시작한 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올해로 51살이 됐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의 나이를 이야기하다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장사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세월이 오래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재고나 팔아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나오지만 손님이 없어 매일같이 허탕이다.
양키시장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합시장으로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됐다. 양키시장이 생기기 전인 1890년대에 중구 신포동에는 어물전(생선전)이 있었다.
채소를 취급하는 '푸성귀전'도 있었다. 신태범의 책 '인천 한 세기'는 "일찍이 19세기 말에 이곳(신포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국인의 푸성귀전이 현재 인천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신포시장의 전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양키시장 자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이었는데, 1925년 매립됐다고 한다. 인천학연구원에서 기획한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라는 책에 따르면, 1937년 이 자리에 '송현일용품시장'이 들어섰다가 1940년대 중반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에 의해 전술적인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미국이 1945년 3월 일본 도쿄에 '소이탄(시가지와 밀림을 태우는 목적으로 개발한 포탄)'을 이용한 공격을 했고, 목조건물이 많았던 일본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소이탄 공격으로 인한 화재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시가지를 중간중간 공터로 만드는 일명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인천의 경우 만석동, 송현동 일대에 3곳이 지정됐는데 양키시장 자리가 포함됐다. 해방 후 제물포상인보존회의 주도로 시장 재건이 추진됐고, 노점상들은 송현동 100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소성자유시장자치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부평 미군기지(캠프마켓) 등에서 시장으로 물건이 흘러들었고, 미군 물건을 팔면서 '없는 것이 없는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도 양키시장과 신포동 일대의 시장 성장사가 잘 설명돼 있다. 전국적으로 이 같은 양키시장이 많았다.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인천과 대구의 양키시장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인천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 됐다. 시장 골목골목에 인파가 몰려 제대로 이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는 사람이 미어졌어." 할머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50만~70만원이었다고 했다. 이 중 10만원 정도가 남았다. 한 달이면 250만원 이상을 벌었다.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 정도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교육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아파트도 샀다.
할머니가 양키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 것은 군복이었다. 1960년대는 국내 옷감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은 그 자체가 유행이었다.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했을 당시 군복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80년대까지도 군복을 구하러 시장에 오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의 현대 의류 역사를 정리한 책 '현대패션 110년'은 1950년대 우리나라의 패션 경향을 군복으로 설명한다. "군용담요는 겨울옷을 만드는 원단이 되었고, 미군의 털양말은 어린이용 스웨터로 활용되었으며, 카키색의 군복 바지는 몸뻬로 개조되었다.
염색한 군담요 의상과 군 점퍼, 미처 염색이 끝나지 않은 카키색 군복을 줄여서 수선한 바지, 그리고 군화를 신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되고 있었다.
미군 군수물자에 찍힌 'UN'이나 'U.S.A.'라는 글자는 염색을 해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미군 담요에 물감을 들여 코트를 만들어 입으면 'U.S.A'라는 글자가 비쳐 나와 그 옷 주인의 별명이 'U.S.A.'라고 불리는 웃지 못할 서글픈 추억도 있었다."
양키시장에서는 군복 이외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물품이 팔렸다. 할머니도 군복 이외에 미군 군화, 반합 등을 팔았다고 했다. 다른 상인들은 통조림, 담배, 과자를 팔고 시장에는 암달러상도 있었다.
할머니는 이들 물품이 인천 부평의 '캠프마켓'뿐만 아니라 서울 용산, 경기도 문산, 동두천 등 수도권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도 흘러왔다고 했다.
동아일보 1955년 5월16일자는 당시 양키시장의 물품이 어떻게 미군 부대에서 빠져나오는지 4단계로 구분해 소개했다. 미군 육지 수송을 할 때 빼돌리기, PX에서 빼돌리기, 미군 부대 출입하는 개인이 가져오기 등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한국에 수송되는 단계에서 대량으로 빼돌린다고 했다.
"흔히 '양키' 물건은 미군인들이나 또는 미군부대에 드나드는 한국인 종업원 등에 의해서 새 나오고 구호품 등에서 시장에 흘러나온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이 방면의 내막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물론 약간의 양키 물건은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빼내오는 소위 '얌생이'에 의해서 시장으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하루하루 소비하고 있는 엄청난 수량의 '양키' 물품은 도저히 그러한 미미한 공급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첫째 단계가 미군 수송선에서 물품이 양륙(揚陸)될 때 그 방면의 요로와 사전 연락이 있은 후 교묘한 수단을 써서 감쪽같이 집더미만한 (때로는 반톤급) 짐 덩어리가 괴짝으로 송두리째 옆으로 흘러나온다. 때로는 조고만 발동선이 동원되고 때로는 한번 덤벙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바깥 세상에 나오게도 된다."
당시 군복을 그대로 입을 경우 불법으로 단속의 대상이 됐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전점퍼나 전투복 상의를 검은색으로 염색해 팔았다. 전투복 하의를 염색한 '스모루바지'도 인기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사이즈가 '스몰(small)'밖에 없어 스모루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대패션 110년'은 "시장골목은 염색집으로 넘쳐났고, 드럼통 염색 솥은 수증기를 뿜으며 쉴 새 없이 군용물자를 삶고 있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일부러 모자를 찢어 다시 재봉틀로 누벼 쓰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역시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었다"고 했다.
이춘화 할머니는 염색하지 않은 옷을 팔다가 여러 차례 단속을 당했다. 단속되면 옷을 빼앗기고 벌금을 물어 한 달 치 수익이 고스란히 날아가니 상인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미군 헌병이나 경찰이 와서 군복을 뺏어가고 그랬지. 뭐 알려주는 것도 없어. 갑자기 와서 다 뺏어가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군복을 많이 내놓지 않고 다른 데 숨겨 놓기도 하고 그랬어."
방일영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생활 100년·옷'에도 이 당시 단속 풍경이 그려진다.
"관공서에서 군복 군화 등 미국 구호 물자를 일반인에게 배급하였는데, 배급하는 것 외에도 도난품이 많아져 경찰 당국으로선 큰 두통거리였다. (중량) 미군 원조 물자 구제품을 염색하는 전문 염색점이 서울 청계천변에 생기기도 하였다. 군용 기름 드럼통에 검정물을 끓여서 카키색 군복을 물들이는 곳이 즐비하고, 방파제로 쌓아 놓은 돌 위에 염색한 옷을 말리는 광경은 복개하기 전 청계천변의 풍속도였다."
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군복뿐만 아니라 작업복, 청바지, 체육복 등도 팔았다. 일주일에 2번은 전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양키시장까지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할머니와 같은 상인이 많아 역전에서 보따리를 든 사람의 탑승을 막기도 했다.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이 봉고차를 빌려다 장을 보게 됐고, 나중에는 택배로도 물건을 받아보게 됐다"고 했다.
양키시장에서는 인천항을 통해 뱃사람들이 가져온 미제 청바지도 팔았다. 일본서 외항선을 타는 사람들이 가져온 가죽점퍼도 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나오는 소위 '짝퉁'도 많았다. 해외 스포츠 브랜드 등이 많았다.
인천학연구원이 낸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는 "1970~80년대 부평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거의 없어졌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 물건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90년대 양키시장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들, 소위 말하는 짝퉁을 파는 시장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는 "예전에는 가짜 메이커도 좋다고 학생들이 찾아 입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가짜를 입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국내 의류산업이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양키시장은 경쟁력을 잃어갔던 거다. 2000년대 초반 단행된 '수입소화물규제'로 중구 항동 제2국제여객터미널 통해 수입상들이 개인적으로 들여오던 물건의 제한량이 40㎏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것도 시장 쇠퇴의 원인으로 꼽힌다.
지금은 시장에 있는 90여 개 좌판 중 절반은 비어 있다. 양키시장 상인 가운데 이북 출신이 절반 이상으로 수십 명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장사를 그만두거나 세상을 떠났다. 양키시장에서 여전히 장사하는 실향민은 할머니를 포함해 3명뿐이다.
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