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사격만이라도 줄여달라 했지만 개선 안돼
사격 안할때 포함한 소음측정 평균치 어이없어
재발방지 약속에도 목숨 위협 도비탄 사고 계속
외부단체 참여 차단 불구 왜곡·호도 분통 터져
보상 앞서 주민 목소리 귀기울이는 진정성 필요
아직 시계는 정오도 가리키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사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위치한 미군사격훈련장인 '로드리게스 사격훈련장(Rodriguez Live Fire Complex·이하 영평사격장) 정문 앞에 거주하는 주민 대다수의 스마트폰에는 소음측정용 애플리케이션이 설치돼 있다.
영평리 마을회관 옥상에도 소음측정기가 설치돼 상시 소음을 측정한다. 한 주민이 스마트폰을 꺼내 포 사격 순간 소음 측정치를 보여줬다. 결과는 75㏈.
도심 도로변 아파트 실내에서 들리는 주간 소음 최대 기준치가 65㏈인 점을 고려하면 시내서 동떨어진 산골짜기 소음치고는 꽤나 큰 편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영중면 영평리 주민들에게 낮에 들리는 이런 사격 소음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
지난 2014년 영평사격장 등 군사시설 피해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조직된 '포천시 사격장 등 군 관련 시설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이길연(61) 위원장은 "만약 도시에서 이런 소음이 1년 365일, 24시간 들린다면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나마 낮 시간에 들리는 사격 소음은 참을 만하다. 주민들이 직접 측정한 야간사격 소음은 거의 매일 100㏈을 넘긴다.
기차 철로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소음이 약 90㏈이고 건설공사 현장 반경 10m에서 나는 소음이 약 100㏈ 수준이다. 사실상 사격장 일대 주민들의 일상은 소음으로 시작해 소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위원장은 "이곳 주민들은 평생을 사격 소음 속에 살면서도 한·미동맹과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왔지만 야간사격만이라도 조금만 줄여달라고 요구한 지가 언 10년이 넘었다"며 "국방부와 주한미군이 나서서 주민들과 MOU까지 체결했지만 전혀 개선된 점이 없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피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민 항의가 갈수록 거세지자 국방부 차관도 현장을 직접 찾는 등 정부의 관심이 쏠리긴 했지만 좀처럼 주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위원장은 "올해 초 차관을 비롯한 국방부 관계자들이 몇 차례 영평사격장을 직접 찾으면서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국방부가 진행 중인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한 용역 역시 날림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포 사격 순간 소음이 100㏈을 넘나드는데 이를 무시한 채 사격이 없는 시간의 소음까지 측정해 평균치를 결과물로 보여준다"며 "이런 결과물이 정부와 청와대에 전달되면 우리 주민들을 생떼나 쓰는 어린애 취급할 것이 아니냐"고 격분했다.
주민들의 피해는 소음만이 아니다.
영평사격장 일대 창수면 운산리와 오가리를 비롯한 영중면 영평·성동리, 영북면 야미리 등 사격장 인접 주민들은 잊을 만 하면 날아드는 주먹 만한 탄환에 목숨까지 위협받는 실정이다.
아파치 헬기와 각종 중화기에서 쏟아내는 탄환이 사격장 내 탄착지에 맞고 튕겨 나가는 도비탄이 날아드는 것이다.
도비탄은 지붕을 뚫고 거실로 떨어지고 축사에 날아들고, 주민들이 일하는 밭에 꽂히곤 한다. 이런 도비탄 사고도 10차례가 훌쩍 넘어섰고 정부와 미군은 그때마다 재발 방지와 시설 개선을 약속했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60년이 넘도록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이런 상황을 견뎌왔다.
그러나 최근 이곳 주민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올해로 4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범대위를 반미세력으로 호도하는 일부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주민들을 제외한 외부 단체나 조직이 범대위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데다 주민들은 항상 정부와 미군, 주민들의 상생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곳 주민 여럿이 공산당이 싫어 북한 떠난 실향민인 데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최대한 불편도 감수하면서 살고 있는데 우리를 두고 반미세력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주 큰 실수"라고 주장했다.
실제 이곳 주민들은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반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던 지난 2003년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영평사격장을 난입한 사건이 있을 때도 학생들을 뜯어말리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범대위를 이끌고 있는 이 위원장은 '전농'으로 불리는 대표적 진보성향 시민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 경기지역 부의장을 맡고 있어 언제든 대형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위원장은 "주민들이 나서 범대위를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전농 대표단은 물론 여러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아 피해를 공감하고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며 "순전히 주민 힘으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우리를 순해 빠진 시골 촌놈으로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반미세력으로까지 몰고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런 섭섭함을 표한 이 위원장은 최근 사드(THAAD)문제가 불거진 경상북도 성주군의 사례를 들었다.
그는 "성주 사드문제가 전국적으로 불거지자 정부는 이를 감싸주기 위해 수조원에 달하는 지원안을 속속 내놓고 있는데 정작 미군에 의한 피해를 수십년이 넘도록 참아온 영평사격장 주민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며 "내년도 미군공여지 주변지역 지원사업에서도 영평사격장 피해 주민들을 위한 대책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범대위는 애초 야간사격으로 잠을 설쳐야 하는 상황을 개선해 주고, 도비탄 사고에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민 요구에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자 이들은 '영평사격장 폐쇄'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영평사격장 주변 주민들의 이런 목소리가 정부에 전달되기만을 바라면서 시작한 영평사격장 앞 1인 시위가 오늘로 764일째를 맞는다.
2년이 훌쩍 넘는 기간이다.
이 위원장은 "주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며 "정부가 주민들의 순수한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부터 영평사격장 폐쇄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참다못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왜곡돼 반미세력으로까지 비쳐지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히고 나섰다.
이 위원장은 "어차피 반미세력으로 낙인 찍힌 마당에 정부까지 주민들의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진짜 반미세력이 뭔지 보여줘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라며 "영평사격장 주변이 반미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곳으로 변해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이어 이 위원장은 "정부가 다짜고짜 보상안만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주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글=포천/최재훈·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 사진=포천/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