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영화화
폭력의 시대와 맞선 인물 군상
유명배우들 '욕심' 덜어낸 연기
뮤지컬 같은 항쟁장면서 '뭉클'
■감독 : 장준환
■출연 :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개봉일 : 12월 27일
■드라마 / 129분 / 15세이상 관람가
때로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있다. 길거리에서 국민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막무가내로 몸을 수색하며, 신문사에 쳐들어와 집기를 때려 부수고 기자들의 머리채를 잡던 시대가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분명히 그런 시대가 있었다. 장준환 감독의 신작, 영화 '1987'은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그 시대를 경험한 이에겐 떠올리기 힘든 기억일 수 있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일 수 있다. 이 시기를 그린 많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각계 각층의 보통사람 심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드물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박희순, 이희준, 김태리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주연급 배우들이 즐비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연과 조연은 따로 없다. 모두가 그 시대를 살아낸 주인공이고, 폭력의 두려움 속에서 실낱같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보통 사람이었다.
1987은 1987년 6월 10일 민주항쟁이 오기까지, 역사의 물밑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시위대 잡는 '공안'검사지만, '대학생이 고문받다 죽었다'는 원초적 진실 앞에 법대로 수사원칙을 밀어붙인 검사의 이야기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수사원칙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느 부모가 서울대 다니는 아들이 갑자기 죽었는데, 부검도 안하고 화장하나"라는 대사에서 그 원칙이 인간성의 기본에 충실했으며,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가늠케 한다.
영화는 대공수사처와 검찰간 작은 불씨가 꺼질 듯 꺼지지 않고 여러 사람의 가슴 속에 옮겨 다니며 활화산처럼 커지는 구조를 차곡차곡 표현했다.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배우들이 달리기 경주를 하듯 맡은 역할에 충실해 욕심부리지 않고 연기하는 모습이 훈훈하다. 짧게 등장했지만 찰나의 표정과 대사로 보통사람의 양심을 표현한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고문실에서 박종철 열사의 시신을 처음 접한 의사와 정치범을 감독하는 교도소 보안계장, 한 줌 가루가 된 아들의 시신을 쓸어담는 아버지, 시신 부검에 입회한 박종철 열사의 삼촌, 대학생 사망기사 취재의 방패막이 돼 준 신문사 부장들 등 국민 모두가 광장에 나오기까지 밑바닥에서 그 불씨를 소중히 살려온 사람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보통사람들이 켜켜이 쌓아온 민주주의를 향한 불씨가 또 하나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한다.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마지막 장면은 지난 봄 우리가 쟁취한 민주주의의 희열만큼 강렬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새삼 이 시대의 귀함을 체감할 수 있다. 시사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끝내 눈물을 보인 장준환 감독은 뭉클한 소감을 통해 이것을 잘 설명했다.
"상업영화의 형식이지만, 진심을 담았다. 온 국민이 뛰쳐나와 직선제를 자각하고 쟁취했던 그 해,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뜨거웠는지, 도저히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