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자수성가 땅 수천평 가진 '중농' 집안
목화가꾸기 좋은 최씨 집성촌 '최촌' 거주
밤참 '냉면' 손님 대접용 '노티' 맛 못 잊어
고구마·함종밤도 유명… 바다와도 가까워
고당 조만식 배출한 교육열 높은 강서지방
유격부대 전력 탓 이산상봉 신청조차 못해
"나 때문에 피해 본 가족위해 밤마다 기도"
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를 정도로 일자무식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샀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태어날 즘에는 수천 평을 가진 중농(中農)이 됐다. 근면과 성실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부모님은 해 뜨기 전에 논에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오곤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 정신(근면·성실)을 잊은 적이 없어."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최촌'이다. 최씨네 집성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최촌은 마을 옆에 큰 다리가 있다고 해서 '큰다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 주변에 '어촌'과 '한촌'이 있어서 3개 마을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촌은 고기 어(魚)자를 써. 어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어. 한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 마을 최촌은 돈이 많았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땅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인 최촌이 바로 그랬다. 최촌은 목화가 많아서 겨울철 농한기에도 일거리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아낙네들이 목화로 천을 만들어 팔았다.
'택리지'에도 '평안도는 산속 고을 가운데는 심는 곳이 드물지만, 들판 고을에는 목화 가꾸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말 문신 문익점(1329~1398)과 그의 장인 정천익(생몰년 미상)이 목화 재배에 성공한 것은 1365년이다. 목화 재배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점차 평안도와 황해도 등 전국으로 퍼졌다. 1475년 성종 6년 4월27일자 '성종실록' 기록을 보면 국가 정책적으로 평안도에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목화는 백성들의 옷감인데 남쪽에서만 생산되고,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도에서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평안도 등에 목화씨를 보내 백성들이 재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고, 성종은 목화씨를 이들 지역에 보내 심게 한 후 관찰사에게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여성의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사 분담도 이뤄졌다. "여자들이 물레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틀로 천을 짜야 하니까 바쁘지. 우리 동네는 겨울철에 남자들이 애를 봐야 했어."
최촌 남자들은 겨울철에 윷놀이를 많이 했다. 날씨가 추우니까 방 안에 모여 앉아 팥알의 절반을 쪼개 윷놀이를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팥으로 하는 윷놀이지. 바쁜 부녀자들 도와줘야 하니까 남자들이 등에 애를 업고 윷놀이를 했다"고 말했다.
겨울철에는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 동치미 국물에 메밀로 만든 면을 넣어 만들었는데, 고향에서는 냉면이 아닌 '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겨울에 목화 일을 도와주면 냉면으로 밤참을 주는 집이 있어. 동치미 국물에 면은 메밀이지. 이북 곡식은 풀기가 많아서 메밀 면을 만들 때 밀가루를 조금만 넣어도 돼. 추운 날씨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먹었었지. 웬만한 집에는 면 뽑는 기계가 있었어."
할아버지는 '칼국수'와 '노티'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향의 칼국수는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로 만들었으며, 큰손님이 왔을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병의 일종인 '노티'는 추석 때 먹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장가루를 엿기름으로 삭혀서 만들면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게 된다"며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가 명절 때나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에 지져서 먹었다"고 했다.
작가 황석영은 지난 2001년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평양 출신의 모친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 번이나 며느리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황석영은 1989년 방북했을 당시 평양에서 어머니의 여동생인 막내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노티를 주면서 만드는 법까지 알려줬다.
'요즈음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 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
"이남 것은 과일도 밭작물도 별로 맛이 없다"고 황석영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황석영은 위도나 기후상 이북 지방의 작물 맛이 월등한 것도 있지만 "어머니의 입맛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였던 셈이기도 했다"고 여긴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ㄷ'자형 벽돌집이었다. 흙집과 초가집에서 살다가 부친이 마을 변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동향집이며 안채·사랑채·부엌·광·외양간·뒷간으로 이뤄졌다. 'ㄷ'자 가운데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겨울에 고구마 등의 곡식은 안방에 보관했다고 한다.
"농사지은 거 밖에 못 내놔. 얼어버린다고. 안방 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그 안에 고구마를 뒀지."
1997년 나온 '평안남도지'를 보면, 1938년 강서군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채소는 고구마다. 강서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평남 16개 시·군 가운데 용강군 다음으로 많았다.
할아버지 고향은 밤도 유명했다. 평남 함종은 밤이 많이 나는 곳으로, 여기서 나오는 밤을 '함종밤'이라고 했다. 최영전씨가 쓴 '한국민속식물'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나는 함종밤은 알이 잘고 단 약밤으로, 중국 종의 감율(甘栗)이다. 함종밤은 속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특징이 있다.
"그게 함종밤이야. 유명하다고. 크지도 않은데 까면 잘 벗겨져. 푸석푸석하지 않고 차지면서 달아. 한 달 정도 둔 뒤에 발로 누르면 밤알이 쑥쑥 나와. 닦아서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지."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 '안석리'는 바닷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다와 가깝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둥이 낚시를 많이 다녔다. 조개도 많이 잡았다"며 "겨울철에 논에서 썰매를 타는데 물에 많이 빠졌다. 바닷가 옆이라서 염분 때문에 딱딱하게 얼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해 바닷가에서 놀았던 추억 때문인지 강화도에 가면 고향에서 낚시했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2대 독자다. 일제강점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후 마을 근처에 개교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중등교육을 받아서, 한국전쟁 때 잠시 인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있었다.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1883~1950)도 평남 강서군 출신이다. 고당기념사업회가 엮은 조만식 전기(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발간사에는 강서군에 대한 설명이 있다.
'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 평안도에서 교육 열풍이 가장 크게 불어 닥친 곳이 바로 강서 일대였다. 강서 지방은 스스로 개화하고 근대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도 컸지만 교육의 힘이 더욱 컸다.'
평양 출신 시인 양명문(1913~1985)은 함종을 찾았다가 밤나무골에 있는 한 연못을 보고 시(詩) 한 편을 얻었다. '샘가에서'라는 시다.
'푸른 산 솟은 밑에 솟는 맑은 샘 / 복숭아 꽃이파리 샘물에 떨어지니 / 그 옛날의 네 모습이 샘물 위에 그려진다 / 아 지나간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여 / 아롱진 가지가지 감격에 찬 그때 일이 / 내 가슴에 펴오른다 내 가슴에 사무친다'
'샘가에서'는 평남 안주 출신의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도 사랑을 받았다.
황윤걸 할아버지 가족은 조모, 부모, 누나, 여동생 3명 등 모두 8명이었다. 하지만 혼자 월남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에 소속돼 평남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휴전 한 달 전에 남한에 왔다.
동키 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지 못했다. 북한 땅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냥 피란 나온 것도 아니고 서해안에서 작전하며 다닌 유격군 출신인데, 이산가족을 찾아? 이북에서 말하는 제일 악질분자가 바로 나야." 할아버지는 "내 신분이 노출됐을 거야. 나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밤에 기도를 하고 자. 우리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거지."
황윤걸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고향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아플 때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 아프면 그냥 고향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