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소년, 가정형편 어려워 대학진학 대신 택한 길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이후 비서실로 자리옮겨
열심히 산 덕에 선·후배 신망 높아… 명퇴 후 비서실장 복귀
흑자 전환 등 성과로 화답… 이제 글 많이 쓰고 싶어

전쟁이 막 끝난 1956년, 경기도 광주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홍승표는 하고 싶은 공부를 다할 수 없었다. 특히 시를 사랑하는, 심성 착한 문학소년은 내 욕심만 부릴 수 없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등학생 문예콩쿠르가 있었어요. 난 시조를 써 냈는데 장원을 했지. 그 문예콩쿠르는 국문학과 장학 특전도 있어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형은 군대에 가 있고, 밑으로 딸린 동생들이 수두룩해 집안 형편상 차마 대학 가겠단 말을 못하겠더라고. 학교 선생님들이 학비를 지원해준다 했지만, 광주 시골에서 서울까지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때마침 광주시 공무원 채용공고가 났는데, 그는 혹시 하는 생각에 가볍게 시험을 봤단다. 그리고 덜컥 합격을 하면서 공직에 들어섰다. "대학은 나중에라도 갈 수 있으니, 일단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미안하셨는지, 공무원을 반대하시더라고.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공직생활을 돌아보면 홍보와 인연이 깊어요. 처음 공보실로 발령받고 보도자료를 썼는데, 그래도 잘 썼는지 내가 쓴 대로 신문에 나는 적도 많았어요. 전입시험을 봐 도청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공보실에서 일했는데 그때도 계속 보도자료를 썼어요. 공무원 되고 내리 3년은 보도자료만 작성한 것 같아요."
업무에서도 계속 재주를 써먹은 덕일까. 198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새벽, 숲길에서'로 당선됐다. 공무원 홍승표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글 잘쓰는 공무원으로 소문이 난 덕에 그의 공무원 인생에 변화가 일었다. 비서실 근무가 계기다. 당시는 임명제인 관선 도지사 시절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 과에서 도지사의 기념사를 준비했는데 그 수준이 형편없었단다.
'글 잘 쓰는 놈'을 골라오라는 도지사의 엄포에, 마침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서실로 끌려갔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도지사를 수행하는 비서실 근무를 연이어 했다.
관선시절 임사빈 지사를 시작으로 이재창, 윤세달, 심재홍, 임경호 지사의 비서실에서 일한 데 이어 민선 도지사인 임창열 지사와 남경필 지사까지 총 7명의 도지사를 보좌했다.
경기도를 이끄는 수장의 곁을 지키는 일은 보람되지만, 고달픈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문화정책, 관광, 총무, 자치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고 과천시·파주시 부시장, 자치행정국장, 도의회 사무처장, 용인시 부시장 등을 역임하며 동료, 선후배들의 신망을 쌓았다.
"당시 인사계에 와서 인사기록카드를 보니 광주시와 달리 도는 대학 나온 사람도 많고 행정고시 출신도 많았어요. 뒷배도 없고, 학력도 짧은 시골 촌놈 입장에선 황당하더라구요. 큰일 났다 싶어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매일 제일 먼저 새벽 출근해서 가장 늦게까지 일했어요. 성실함을 좋게 봐준 덕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그는 동료와 후배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무원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7급 봉급이 봉지쌀로 6개, 연탄 20장 살 돈 밖에 안되는 월급이었어요. 내가 힘들었던 만큼, 주사보 이하 후배들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간부가 돼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 밥은 무조건 제가 사줬어요. 지갑을 못 열게 했죠. 또 총무과장을 할 때, 도지사를 설득해 도청 공무원 건강검진에 암 검진을 항목에 넣었어요. 그때 실제로 10명 가량의 직원들에게서 암이 발견됐고 치료를 받았어요."
'경기도를 빛낸 영웅' 선정, '다산대상 청렴봉사 대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지만, 도청 공무원들이 직접 선정한 '함께 근무하고 싶은 베스트 간부 공무원'에 4년 연속 선정된 것이 가장 보람차다.
그 마음 때문일까. 그는 2013년 용인시 부시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을 했지만, 세간의 시선을 무릅쓰고 남경필 지사와 후배 공무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비서실장을 했다.
1급 관리로 퇴직한 그가 4급으로 돌아왔고, 연금도 전부 중지되고 퇴직금도 반납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서는 30년을 몸담은 도청 식구들과 새 도지사가 화합해 도민을 위한 도정을 꾸리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한가지 마음 뿐이었다.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일했던 지난 2년의 시간도 그는 허투루 쓴 적이 없다. 비싼 관용차 타고 '사장' 역할만 하지 않았다. 경기도 산하기관장이 직접 도내 31개 시군을 돌아다니며 공동 관광 마케팅과 상품개발 협력을 위해 뛰었다.
덕분에 31개 시군과 관광마케팅을 진행하고, 연천군과 연강 갤러리·그리팅 맨 설치사업을, 수원시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협업을 해냈다. 또 민간업계와 적극적인 스킨십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추진했다.
임기 마지막 달인 12월에도 그의 일정은 일거리로 빠듯했다. 아시아나와 협력해 대만 관광 프로모션을 성대하게 진행해 타지역 관광공사들로부터 시샘을 받았다.
"산하기관장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 많아요. 공무원 시절엔 사실 비행기 탈 기회도 없는데, 기관장이 되니 비행기 탈 기회도 많구요. 하지만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직원들을 보냈어요. 비즈니스 좌석을 바꿔 이코노미로 타고 줄인 비용으로 직원을 더 데리고 갔죠. 생각해보세요. 나는 임기가 끝나면, 갈 사람이지만 직원들은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관광공사를 책임지고 사장까지 해야 돼요. 그 토대를 마련해주려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적자였던 공사는 홍 사장의 취임 후 15억 흑자 기관으로 바뀌었고, 다양한 사업을 통해 경상비용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전국 공공기관 내부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천생 공무원이다. 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선배다.
"공무원은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국민이 위임한 일을 심부름하는 역할입니다. 일부 선후배 공무원들이 그것을 권력이라 착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은퇴 후에 결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어요. 공무원은 내가 맡은 이 업무가 국민의 불편을 덜게 하는데 쓰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후배 공무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며 그가 후배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간결하지만, 정확하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묻는 질문에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무조건 쉴 것'이라고 답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법하다.
"이제 두달 간은 아무 생각없이 쉬어보려고 합니다. 그 후의 일은 또 연이 닿는 만큼 해봐야죠. 적십자나 공동모금회 같은 봉사단체에서도 일하고 싶고, 무엇보다 글을 많이 쓰고 싶어요." 쉬겠다면서도 그는 또 꿈을 꾼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반짝이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홍승표 사장은 누구?
▲1956년 경기 광주 출생
▲광주상업고-국제사이버대학 법률행정학사-경기대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
▲1975년 경기 광주 공보실에서 공직생활 시작
▲과천시부시장-파주시 부시장-경기도 자치행정국장-경기도의회사무처장-용인시 부시장
▲2014년 7월~12월 경기도 비서실장
▲2015년 1월~ 경기관광공사 사장
- 수상경력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1988)
▲정부 모범 공무원(1986)
▲국무총리 표창(2003)
▲다산대상 청렴봉사부문 대상(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