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영감' 버스에서 얻어
매일 눈 뜨는 게 너무 신나
시간 많은 노인에겐 최고의 놀잇감
내가 글 쓰는 사람인 건 행운
한국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어린이들의 친구인 윤수천 작가는 인터뷰가 약속된 날(지난 17일)도 버스를 탔다. 추운 날씨에 건강을 걱정했더니 "나는 버스 타는 일이 정말 즐거워요.
아무 일이 없어도 버스를 타고 세상 한바퀴를 돌기도 해요. 혼자 가만히 앉아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 버스만큼 좋은 게 없지요. 내 동화의 영감은 대부분 버스에서 나왔어요"라며 맑게 웃었다.
그는 지금도 매일 글을 쓴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너무 신이 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하는 일이 설레거든요. 나같이 시간 많은 노인은 놀잇감이 필요해요. 혼자서도 잘 놀수 있는 일 중에 글 만한 것이 없어요. 나는 내가 글쓰는 사람인 것이 몹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윤 작가의 삶은 '글' 쓰는 것이 좋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님이 나를 너무 귀여워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어요. 심지어 물가가 위험하다며 가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지금도 수영을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너무 귀하게만 키우셔서 오히려 모험에 대한 갈증이 강했던 것 같아요. 행동으로 옮기질 못하니,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게 즐거웠어요. 문학은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윤 작가에게 글은 가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 친구가 됐고, 나이가 들수록 재능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체신국(지금의 우정청)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국방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으로 일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모두 글과 연결돼 있다.
"다른 공무원은 승진이 중요한 가치였지만, 나는 승진을 바라지 않았어요. 글쓰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에도 바빴으니까요. 국방부 정훈국에 간 것도 내가 흠모하던 소설가 선우휘씨가 정훈장교 출신이어서 막연히 정훈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렇게 10여 년 국방부 본부에서 근무를 했고, 승진하기 싫어서 국방일보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곳에선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한평생 글을 써도 대표작 하나 내기 힘든데,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여섯 작품이 실렸을 만큼 대표작이 많다. 올해에도 그가 2011년에 쓴 '할아버지와 보청기'가 초등학교 4학년 국어활동 교과서에 실린다. 그의 작품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나는 삶이 소설 같지 않았어요. 사납게 살지를 못했어요. 젊었을 때야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워낙에 정을 많이 받고 자라 삶이 동화 같아요. 동화를 써야 하는 게 내 그릇이죠. 나는 아동문학의 궁극적 목표가 희망과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절망이 있어도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의 씨앗을 보여줍니다."
할아버지와 보청기만 해도 '소통불가'로 치부해버린 노인의 세계를 아이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로당 앞에서 보청기를 슬그머니 빼 주머니에 넣은 할아버지를 의아해 하던 손자에게 뻥튀기 할아버지가 넌지시 속사정을 말해준다.
'할아버지들이 너희처럼 귀가 밝아서 남이 한 말을 제때제때 알아들으면 하루해가 얼마나 길겠니.'
그가 애착을 갖는 작품도 그런 유다. 2008년 작 '나쁜 엄마'는 뺑소니로 아버지를 잃고 하루아침에 두 딸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생선장수 엄마를 미워하던 딸 난희가 거친 엄마의 손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며 마음 속의 응어리를 푼다.
"동화라는 것이 대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가급적 소외된 아이들을 밖으로 꺼내 따뜻하게 감싸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편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사는 난희도 그렇고, 뇌성마비 아이가 상상 속에서 고래를 그리는 희망을 노래한 '고래를 그리는 아이'나 몸집이 크고 행동이 굼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고릴라와 세희의 우정을 그린 '내 짝꿍은 고릴라'도 사회의 그늘 속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 그 아이들의 진짜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줬죠."
그는 동화의 효용을 어린이에 국한하지 않았다.
"어린이가 늘 어린 상태로 있지 않아요. 동화의 주 독자가 어린이지만, 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동화는 어른이 읽어도 유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의 마음 속에도 어린이가 있어요. 동화만이 갖는 전파력이 어른에게도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데 주저하지 않아요."
살다보면 다 큰 어른도 위로받고 싶다. 작가는 '행복한 지게'를 통해 어리숙한 아들이 나이 든 아버지를 업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모습이 우습지만, 아버지가 즐겁고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이 시대 어른들을 다독인다.
오는 3월에 내놓을 신작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봇 가사 도우미가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있는 엄마를 깨우는 '로봇 은희'와 치매 걸린 노모를 등에 업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곧잘 해주던 기차놀이를 하는 아들(가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이 등장하는데 현실에 지친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그의 동화는 가슴 따뜻하게 독자를 안아준다.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동화의 궁극적 목표지만, 시대가 달라지면 꿈을 표현하는 동화의 방식도 달라져야 해요. 옛날의 효와 오늘날의 효가 전혀 다르고, 아이들이 겪는 문제와 그 세계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이웃이라 말하더라도 이제는 전세계가 이웃인 세상이에요. 동화도 시대에 맞게 아이들이 꿈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타가 돼줘야 합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넓혀주고 다양한 시각을 많이 보여줘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관찰해서 그에 맞게 동화를 쓸 생각이에요."
동화를 쓰는 일 말고도 그는 글쓰기에 관련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원 중앙도서관에서 13년째 하고 있는 '행복한 글쓰기'는 물론 기업,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 강의 요청이 있으면 나선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마음 속에 쌓인 것들이 많은 거겠죠. 그 욕구를 표현하는 데 글 만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늘 강의에 나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글을 곁에 두고 있어 행복함을 느낀다고. 글쓰기 위해 사색하고 생각을 다듬는 일이 즐겁다고요.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겠죠."
문득 윤수천 작가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우리 곁에 남아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도 기댈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한 법이다.
■윤수천 작가는?
-주요 약력-
▲1942년 7월 29일(음력) 충북 영동 출생 ▲1954년 11살 되던 해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 ▲1960년 19세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주최 전국 고교생 한글시 백일장에서 장원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항아리'로 당선 ▲1981년 첫 동화집 '예뻐지는 병원' 출간 ▲199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심사위원
-주요 작품-
▲별에서 온 은실이 ▲행복한 지게 ▲꺼벙이 억수 ▲엄마와 딸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고래를 그리는 아이 등 동화와 동시 80여 편
-수상 내역-
▲소년중앙문학상 '산마을아이' '아침' 우수작 ▲경기도문화상 ▲한국아동문학상 '꽃가게 손님' ▲방정환문학상 '돈키호테 소방관' 등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