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입·출항 50척중 2~3대 선별 불시점검
선실·엔진실 등 벽틈·환풍구 빠짐없이 살펴
수상한 움직임 선박, 직접 배 운전하며 순찰
선원 강한 반발에도 '경고 메시지' 예방 효과
경제성장기 외국물품 수십배 가격에도 불티
사치품·건강식품·마약·농산물 밀수로 몸살
미·영·호주 등 '안보 업무 강화' 세계적 추세
바다 넘어 하늘길까지 '경제·안전' 보호 한몫
무역 규모가 커지고 관세의 비중은 낮아지면서 각 나라의 세관은 마약, 무기, 밀수로부터 국민의 삶을 보호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경인항부터 영흥항까지 바다의 관문을 지키는 인천본부세관(이하 인천세관)은 인천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오전 9시께 인천항 제1국제여객부두. 중국에서 온 카페리(화객선)가 인천항에 들어오자 인천세관 인천항감시과 강정수(49) 계장(검색팀장)과 직원 8명은 선박 불시점검을 위한 출동 채비에 나섰다.
이 카페리는 2016년 12월 세관이 적발한 '개항 이래 최대 국제 금괴밀수(423㎏, 200억 원 규모) 사건'과 관련된 선박이다.
중국 단둥을 오가는 이 선박에서 일하던 조리사는 개인 선실에 금괴를 숨겨 수차례 빼돌렸다가 끝내 붙잡혔다. '우범선'으로 분류된 이 선박은 이날 인천세관의 불시점검 대상이 됐다.
"여기가 선실입니까?" 선박에 들어서자 강 계장은 선원이 머무는 선실을 찾아 문을 열었다. "쏘리(Sorry)." 긴 항해를 마치고 잠을 청하는 선원이 많다 보니 양해를 구하고 점검을 시작했다.
심하게 벌어진 벽 사이 틈, 열리지 않는 서랍, 유난히 깨끗한 환풍기, 풀려 있는 볼트.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엔 강 계장의 손이 닿았다.
그렇게 5~6개 선실을 확인한 강 계장은 식당, 창고, 여객실을 차례로 살폈다. 강 계장은 천장과 벽을 손으로 계속 두드렸다. 소리가 다르면 무언가 숨겨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기관장이 있는 기관실도 점검을 피할 수 없었다. 강 계장은 손전등을 들고 기름 냄새와 모터 소리가 꽉 찬 깜깜한 기관실을 샅샅이 점검했다. 총톤수 1만6천여t 선박 점검은 1시간30분이 지나서야 마무리됐다.
강 계장은 "선박 규모가 큰 만큼 구조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최근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마약, 밀수, 테러 등 우려가 있어 혹시 비밀 창고가 있는지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감시과 직원들은 하루에 인천을 통해 입·출항하는 50여 척의 선박 중 2~3대를 선별해 이같이 불시점검을 벌인다.
선박 검사 후엔 해상 순찰도 나선다. 강 계장은 지난 20여 년간 인천세관에서 해상 감시정을 운항한 정장이기도 하다. 감시정은 다른 배와 바짝 붙어 있거나 방수팩으로 꽁꽁 묶은 물품을 해상에 띄우는 등 '수상한' 배가 있는지 감시한다.
이날 오전 11시께 탄 감시정은 '남궁억호'다. 1883년 6월16일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 개관 이후 이듬해 문을 연 '경성총해관'의 직원이자 독립운동가 한서(瀚西) 남궁억의 이름을 땄다.
인천해관에서 근무한 최초 조선인은 남궁억의 '동문학' 동기인 홍우관이다. 동문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학교로, 남궁억과 홍우관은 이곳에서 1년간 영어를 배운 후 해관에서 근무했다.
감시정은 남궁억호 외 우리나라 최초 군함의 이름을 딴 '광제호', 인천의 옛 지명을 딴 '미추홀호' 등 모두 3대다.
강 계장은 "단속 일을 하다 보면 선원들과 다투기도 하고 민원이 심하게 들어오는 일이 부지기수"라며 "그러나 항상 우리가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인식을 주고 범죄를 예방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인천세관이 이렇게 감시 태세를 놓지 않는 이유는 뭘까. 강화도, 태안, 수원까지 상권을 형성했던 인천항은 1911년까지 한국 무역의 50% 이상이 이뤄진 항구였다.
서울과 가까워 현재까지도 외국 상인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세관의 역사를 보면 인천항은 개항 후 해방 전까지는 열강의 각축전으로, 해방 후엔 밀수로 몸살을 앓았다.
정부는 뒤늦게 총세무사에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f), 인천해관장에 영국인 스트리플링(A.B. Stripling)을 고용하고 1883년 인천해관을 세워 처음 세수 업무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관세 자주권을 잡으려 했던 우리 정부의 의도와 달리 해관은 오랜 기간 외세에 휘둘렸다. 청국 정부는 자국 상인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를 압박해 2년여 만에 뮐렌도르프를 끌어내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미국인 메릴(Henry F. Meril)을 총세무사 자리에 앉혔다.
해관에 고용됐던 서양인의 월급은 청국에서 지급했는데, 이는 해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조치였다. 1896년에는 세력이 강해진 러시아가 영국인 총세무사를 해임하게 하고 러시아인을 부임케 했다가 영국의 강력한 반발로 1년 만에 다시 영국인 총세무사가 부임하는 일도 있었다.
1907년에는 일본이 세관관제개정을 공포해, 중국식 명칭인 인천해관을 인천세관으로 바꾸고 세관의 실효적 지배를 시작했다. 인천세관은 개관 64년 만인 1947년에야 비로소 한국인 세관장(김준덕)을 맞았다.
1960년대 인천항은 다이아몬드, 진주, 시계, TV 등 사치품 밀수가 극심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 밀수돼 온 냉장고, 카메라 등 가전제품은 우리 산업에 큰 타격을 줬다. 정부는 밀수를 폭력, 탈세, 마약과 함께 '사회 4대 악(惡)'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6월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제정해 밀수하는 자를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세관 직원에도 적용됐다.
1962년 2월1일자 경향신문은 시계 '에니카' 340개를 밀수하려 한 선원을 부정 통관시켜 주려 했던 세관 직원 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보도했다. 밀수를 시도한 선원이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훨씬 큰 처벌이었다.
경제성장 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던 1970년대 말은 건강 보조식품과 마약 밀수가 활개를 쳤다. 이 시기 인천세관에서 근무한 이염휘(72) 한국관세협회 인천지부장이 실제로 적발했던 '파나마 국적 외항선 중국 선원 밀수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79년 12월28일 경기신문(현 경인일보) 보도를 보면, 파나마 국적 외항선 중국 선원 24명이 수차례에 걸쳐 인천항으로 우황청심환, 해구환, 녹용 등 10억 원어치를 밀수해 구속됐다.
이 지부장은 "중국 선원들은 비밀 창고 2개에 밀수품을 숨겨왔는데 대부분이 가짜였다"며 "그땐 외국 물품이라고 하면 수십 배의 웃돈이 붙어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말했다.
1980~1990년대는 참깨, 고추, 바나나, 오렌지 등 농산물 밀수가 많았다. 농산물 관세는 예나 지금이나 100% 이상 관세가 붙었는데, 수출용 원재료를 수입하는 것은 관세가 붙지 않았다.
이를테면 업자들은 바나나 잼을 만든다며 바나나를 수입한 후, 반은 그냥 팔고 잼에는 향료를 넣어 수출하는 '합법적' 밀수를 벌였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카페리가 활성화된 후에는 중국 보따리상의 밀수입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시아 어선과 컨테이너 화물을 통한 마약·짝퉁 밀수입도 끊이지 않고 있다. 밀수 규모는 1965년 7천여만 원에서 2013년 8천억 원대까지 커졌다.
이 지부장은 "지금이야 첨단 장비로 조사하지만 옛날 직원들은 직감과 제보에 의지해 오로지 맨몸으로 밀수꾼을 잡아들였다"며 "어지러웠던 시절 세관 직원은 경제와 안보를 지키는 최전방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세관을 국토안보부 산하에 두고 CBP(Customs and Border Protection)로 명칭을 바꿨다. 영국, 호주 등의 국가에서도 세관 이름에는 '보더(Border·국경)'가 들어간다.
세관의 국경 보안 업무는 이미 세계적 추세다. 인천항 입항 외항선 8천여 척, 세수 20조 원대. 135년 역사의 인천세관은 이제 바다 국경뿐만 아니라 하늘 국경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지키고 있다.
인천해관·세관의 역사를 연구한 '자타 공인' 세관사 전문가 김성수(53) 울산세관 감시과장은 '세관의 역사를 왜 연구하느냐'는 질문에 "세관이 근대사 발전과 우리 삶의 안전을 지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을 남기고 싶다"고 답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