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동에서 '메리야스' 장사를 하던 청년은 그 옛날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던 '공순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를 지키고 있다.
인천 유일의 학력인증 평생학습 기관 '남인천중·고등학교' 윤국진(73) 교장은 "단 1명의 만학도가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 최초 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을 개설해 배움에 목말랐던 만학도의 꿈을 이뤄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월 31일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국민훈장에 준하는 국민포장은 각계각층에서 묵묵히 국민을 위해 헌신한 유공자에 수여하는 포상으로 대통령표창보다 한 단계 높다.
남부러울 것 없던 그의 유년기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산산조각 났다. 제대하고 돌아온 형은 집과 땅을 몰래 팔아치웠고 윤 교장은 어머니, 누나와 함께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학교는 다녔는데 점심을 싸가지 못하니까 물로 배를 채우고, 결국에는 수업료를 내지도 못해 국민학교 졸업장도 따지 못했어요. 누나와 산에 가서 땔감용 솔방울을 따다가 8㎞ 떨어진 증평에 팔면서 끼니를 때웠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도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리셔서 '왜 어린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나' 하늘을 원망했어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다.
보리쌀과 풀죽을 쑤어먹으며 살았던 그는 어머니를 시집간 누나의 집에 맡기고 13살의 나이에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함께 인천에 가자고 했던 형은 연락을 끊고 사라졌고, 먼 친척에게서 150환을 얻어 인천으로 떠났다.
"기차표를 사려니까 돈이 부족해 영등포행 표를 산 뒤 인천까지 무임승차로 가다가 역무원에게 걸렸어요. 이를 딱하게 여긴 동인천역 역무원이 하루를 재워주고 역전에서 신문보급소를 하는 지인을 소개해줘 그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지요."
그 뒤로 윤 교장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과자공장, 구두닦이, 도넛가게 점원,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돈 되는 일은 다 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배움을 잊고 살던 그에게 지나던 대학생이 건넨 말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돈 벌어서 한다는 놈치고 공부하는 놈을 못 봤다"는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윤 교장은 대학생 형이 소개해준 독학 교과서인 '서울강의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넛가게에서 손님으로 만난 고학생을 따라 경동사거리의 한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고아가 된 학생, 섬에서 온 학생,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꿈을 키우는 소년들이었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윤 교장을 우연히 본 당시 영화중고등학교(현 대건고등학교) 교사가 야간학부로 오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이어가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하니 23살이 됐고 군 입대를 하게 됐다.
제대 후 아내를 만나 결혼한 그는 가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불우청소년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직장을 다니기는 했는데 월급으로는 턱도 없으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70년 당시 코오롱에서 나오던 '메리야스'인 '88나이롱'을 구로동에서 가져다 신포시장에서 팔았죠. 백화점 물건과 차이는 없는데 가격이 싸니 잘 팔렸었죠." 10년 뒤 그는 '현대의류백화점'이라는 번듯한 의류판매업소를 열어 제법 큰 돈을 벌었다.
윤 교장은 1984년 7월 중구 선린동 인천역 앞에 있는 2층 규모 연립주택을 학교로 개조해 '남인천새마을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오랜 꿈을 이룬 순간이다.
새마을금고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인수해 '공순이'라고 불리던 근로 청소년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4개의 교실과 기숙사를 만들고 10명의 교사를 채용했다. 사재를 털어 타자기와 실습기자재를 사들였고 은행 대출을 받아 학교를 운영했다.
문제는 근로 청소년들의 졸업장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수료해도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해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중·고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 선린동 연립주택으로는 800여 명의 학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용현동의 쇼핑센터를 빌려 학교로 사용하다가 1990년 남구 학익동 지금의 학교 부지(6천890㎡)로 이전하게 됐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한 뒤 국유지를 매입해 복지관과 학교 건물을 지었다.
복지법인 전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다. 이어 문교부로부터 전 과목 학력인정을 받아 교명을 남인여자상업고등학교 개명했다.
학교가 점차 자리 잡자 그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장년층에게도 졸업장을 딸 기회를 주고자 했다. 여자라서 또는 막내라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무학(無學)의 한을 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만학도의 꿈을 이룰 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은 1999년 개설됐다. 인천 최초의 성인 대상 학력인증 학교였다.
"1950~60년대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못 배운 사람이 많은데 부끄러워서 이를 밝히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내 또래 어른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자는 생각에 성인반을 개설하게 됐죠."
1년 3학기제의 단기 코스로 교육청 인가를 받아 2년 과정의 중·고교반을 개설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5천700명의 성인 학생을 배출해 이들이 제2의 인생을 살도록 도왔다.
특히, 올해부터는 인천대학교 평생교육원과의 업무협약 체결로 남인천중고등학교 졸업생이 인천대에서 전문학사 취득과 학사과정 편입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윤 교장은 건강을 유독 챙긴다. 자신이 없으면 학교가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인 학교의 인가를 윤 교장 개인 명의로 받았고, 이는 승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윤 교장이 곧 학교를 의미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5번이나 완주할 정도로 운동광인 그는 관교동 집에서 학익동까지 매일 걸어서 출퇴근한다.
"인천에 중·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학교를 운영해야 합니다. 이번에 받은 국민포장은 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배움의 한을 풀어준 우리 학교, 학교 구성원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록수' 정신으로 더 정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윤국진 교장은?
▲1945년 충북 괴산 출생
▲1957년 인천으로 이주
▲1970년 신포시장에서 내의가게 운영
▲1980~2010년 현대의류백화점 운영
▲1984년 남인천새마을실업학교 설립(교장 취임)
▲1988년 사회복지법인 백암한마음봉사회 설립(대표이사 취임)
▲1991년 인천종합사회복지관 초대관장
▲1991년 백암어린이집 초대원장
▲2000년~ 남인천중고등학교 교장
-상훈
▲1988년 인천시민상(사회봉사부문) 수상
▲1990년 인천교육대상 수상
▲2018년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