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제암리교회학살 은폐 증거
학계·언론 활용 미흡 '아쉬움'
정보법 강화로 제적부 못봐
다양한 투쟁 미서훈 선열들
행적조사·기록찾기 '어려움'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은 세계 근현대사를 통틀어 인류의 잔혹한 만행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극이다. 3·1만세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일본군이 가장 저항이 거셌던 화성, 그 중에서도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몰아넣고 방화, 살인을 저질렀다.
이와 관련해 일본군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은폐가 있었다는 증거가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조선 군사령관이던 일본 육군 중장 우쯔노미야 타로가 쓴 '일기'가 2007년 '우쯔노미야관계자료연구회'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저항하는 자를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과 '전적으로 부인하면 오히려 불리해지니 일부의 과실만 인정하고 행정처분을 내리는 것이 득책'이라는 회의 내용이 적혔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언론에서는 크게 다뤄진 바 없다.
지난해 발간된 '수원야사'에서 이를 언급한 저자 이창식씨는 "이같이 중요한 사료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여길 정도"라며 "일본이 피해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기 꺼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 자료를 연구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서울 아닌 지역의 독립운동이 주류 역사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지역 내에 독립운동을 연구하고 조사할 행정, 학문적 토대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도 "식민지배가 36년간 길게 이어져 독립운동의 형태도 다양하고, 참여한 이들도 방대하다.
특히 중앙정부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의 활동가들이 상당히 많다"며 "홍면옥의 경우도 보훈처가 파악하고 있을 만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만, 선생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히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면서 직계가 아니면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연구하는 기초자료인 제적부조차 열람할 수 없다.
이정일 화성시 학예연구사도 "2016년에 서훈된 독립운동가 후손은 첫 통화에서 서럽게 울었다. 혼자 선대의 기록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찰나에 우리의 연락을 받아서다"라며 "지자체가 제적부만 열람할 수 있었어도 후손들이 서럽게 우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법무부는 사례가 없다며 거절하고, 국가기록원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전부 지우고 보낸다. 지자체가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무슨 수로 이를 찾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를 통해 우리는 이 땅의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를 만났다.
독립운동은 가족은 물론,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일이었다. 전 생애를 바쳐 자신을 버려야 가능했다. 삼일절 100주년을 앞두고 경기도는 물론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
과연 100년의 숫자에 취할 만큼, 우리는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인가.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