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기술 배우려다 인연
한번 시작하면 뿌리뽑는 성격
원대한 뜻 아닌 삶의 한부분
1960년대 '한창 날리던' 정경화처럼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 중학교 1학년인 1969년 경향신문 주최 '제18회 전국 남녀 음악 콩쿠르'에 출전해 중학부 1등을 차지했다.
"한 번 시작하면 뿌리를 뽑는" 성격이었다. 사춘기에 들어설 무렵 찾아온 무대 공포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누구나 다 경험하는 것'이었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극도의 떨림이 계속됐다.
부모님 권유를 받아들여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집중했다.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 2등으로 졸업했다. 서울대 최초의 여성 피부과 전공의가 됐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 되던 해 피부외과에 도전했다. 수술 테크닉을 배워야 했다. 당시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 전신)에 있던 안성열 과장을 무작정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피부과, 성형외과 전문의 면허를 취득한 의사로 흉터 부분의 전문가였다. 그 때 안성열 과장의 권유로 경기도 의왕에 있는 한국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에서 무보수 촉탁의를 1997년 시작했다.
그 때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스케줄은 한센병 진료·수술이었다. 올해로 22년째다. 박향준(62) 가천대 길병원 교수(피부과) 이야기다.
- 한센병 진료 봉사를 20년 이상 꾸준히 이어 오고 계십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지속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사명감으로 시작한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안성열 원장님 도와드리고, 개인적인 필요로 시작했어요. 안 원장님과 저 두 사람이 나눠서 외래 환자를 보고 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더 기여하는 바가 확고해지고, 이 곳에서 제 몫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겁니다. 이제는 매주 월요일 오전 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에 나가는 것이 제 생활의 일부, 스케줄의 일부가 됐습니다."
(안성열 원장은 1989년부터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한센인 재활 성형을 도왔고, 1992년부터 매주 월요일 한국한센인협회 부설의원으로 출근한다. 현재 서울에서 안성열 성형외과·피부과 원장을 맡고 있다)
- 한센인 재활 성형, 왜 중요한가요.
"한센병은 영구적 신경 파괴 질환입니다. 신경은 복구가 안 돼요. 감각이 없어지면, 근육도 마비됩니다. 안면근이 마비되면 눈을 감을 수가 없는데, 눈을 못 감으니까 염증이 생깁니다. 그게 실명(失明)으로 이어지기도 하구요. 입이 안 다물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남 보기에 안 좋을 뿐 아니라 밥도 잘 못 먹습니다. 치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2차, 3차 수많은 후유증을 유발해서 정상 생활을 못하게 합니다. 삶의 질이 말이 아니게 되는 거죠. 신경 손상된 것은 복구하지 못하겠지만, 겉모양이 좋아지면 환자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센균의 특징 중 하나가 연골을 침범해 흡수합니다. 코뼈가 없어져요. 누가 봐도 납작코면 한센병이라고 해요. 그것을 스티그마라고 해요. 그렇게 되니까 환자들의 일반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요. 재활 성형이 반드시 필요하죠. 신경이 없어지면 근육 장애가 오고, 근육을 쓸 수 없으면 위축돼 없어져요. 손등에 푹푹 파인 골이 생겨요. 그것을 사람들이 한센병의 한 사인으로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복부에서 지방을 빼서 채우는 거예요."
- 한센병 진료 22년. 힘든 건 무엇인가요.
"직장 여러 번 옮겼는데, 알력이 많았어요. 의사는 오프 시간대에도 병원에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에요. 그래도 양해해달라고 하면 수용해주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반면 그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제 일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얼마든지 이해를 해주고도 남을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병원장 말을 거부하고 월요일 오전 진료를 이어나갔어요. 그런 저를 두고 '문제가 많은 의사다', '반골이다'라는 평가가 들려왔을 때가 마음 아팠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 서울대 의대 여성 1호 피부과 전문의로 기록돼 있습니다. 왜 피부과를 선택하셨나요.
"여성(의 의료계 진출)이 지금 같지 않았을 때죠. 당시 피부과 인기도 없었고, 여자는 잘 뽑지도 않았어요. 다른 과도 마찬가지였어요. 대학교 5~6년 선배 중 한명은 1등으로 졸업했고 소아과를 지원했는데 거절당해 내과로 갔어요. '임신하고 그러면 전력에 손실이 온다...' 뭐 이런 이유였죠. 예전에 실습할 때 이비인후과에 가니 '여학생 안 뽑으니까 어플라이하지 마!'라고 말하던 분도 계셨고, 뽑아도 큰 인심 쓴 것처럼 생색내는 분도 많았죠. 외과에는 여자가 없었어요.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죠. 마흔살쯤 피부외과를 시작했어요. 피부외과는 표피, 진피, 피하지방, 근막까지 담당해요. 뼈와 골격은 정형외과 분야고요. 피부외과 전문 인력이 없어요. 어렵기만 하고. 수술도 해야 하고. 수가도 안 받쳐줘요. 수술하면 할 수록 손해니까 병원도 꺼리죠. 많은 선생님들이 수술을 해서 테크닉을 갖추면 미용 쪽으로 전환해요. 그게 수입도 많고. 그래도 피부과 입장에서는 피부외과 전문 인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소녀가 피부과 의사가 됐습니다. 전환점은 무엇이었나요.
"중학교 2학년 때 무대 공포증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춘기 때문이었는지 극복하기 귀찮았습니다. 제가 경쟁심이 강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선생님이 '공부에 재주가 있는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힘이 됐습니다. 제가 음악한다고 정말 돈 많이 들었는데, 그게 미안해서 부모님 희망인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기도 해요."
(박향준 교수는 경기여고 63회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영란 전 대법관, 조배숙 전 의원이 동창이다. 박 교수는 남편, 아들, 딸, 며느리 모두 의사다)
박향준 교수는 길병원에 부임하면서 바이올린을 다시 잡았다. 개인 레슨도 받는다.
서울대 의대 메디컬 오케스트라 이후 30여 년 만의 일이다. '아마추어도 꾸준히 연습하면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사실 (매주 월요일 의료 봉사는) 내 생활의 일부, 스케줄의 일부가 됐을 뿐이지 무슨 원대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번 시작하면 뿌리를 뽑아야 하고, 무엇을 하다가 중단하면 자책하는 성격의 박 교수. 그렇게 그는 '한센인 환자 월요 봉사'에 나서고 있다.
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1956년 서울 출생
▲매동초, 금란여중, 경기여고,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
▲1981년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피부과 레지던트 수료
▲1985년 고려대학교병원 전임의
▲1995년 일본 토라노몬 병원 피부외과 연수
▲1996년 단국대학교병원 조교수, 부교수
▲1997년 한국 한센복지협회 부설 의원
성형·재건 담당 위촉의사 시작
▲2002년 미국 오레곤보건과학대학교
피부외과 연수
▲2007년 제일병원 피부과
▲2009년 중앙보훈병원 피부과
▲2015년 장기려의도상 수상
▲2018년 보령의료봉사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