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사회 문제 치매 주제, 어려운 병일수록 배우자 역할 중요 메시지
희로애락 담아낼 수 있는 노인테마 소외카드 아냐, 시트콤 만들라 말해
이길여 총장 신뢰해 가천대서 연기 지도, 학생들에 발성연습 가장 강조
지난해 이맘때 서울 동숭동 예그린씨어터 무대에서 첫 선을 보인 '사랑해요, 당신'은 이어서 대구와 안성에서 공연됐으며, 연말 인천 부평아트센터 공연까지 전체 60여회 공연 중 40여회에서 전석 매진되는 등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오는 27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펼쳐진다.
아내이자 엄마로 40년 넘게 살아온 한 여성에게 치매 증상이 찾아오며 변화를 겪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에 대다수 관객은 눈물을 흘리며 공감했다.
이순재와 정영숙, 장용과 오미연의 자연스러우면서도 호소력 짙은 연기와 함께 평범한 가정에 불어닥친 당혹스런 상황이 만들어낸 안타까움에 관객은 공연과 어우러졌다.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711만명 가운데 10%가 넘는 72만명이 치매 환자다. 누구나 치매로 고통받는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연극을 제작한 극단 사조(대표·유승봉)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천대 길병원 의료진의 자문을 얻어 극적 완성도를 높이기도 했다.
다시 70대 중반의 남편 '한상우'로 분해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무대에 오를 배우 이순재와 최근 서울 강남구의 SG연기아카데미에서 인터뷰했다.
이달 초 개봉한 영화 '덕구'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영화의 주연 배우로서 연일 매스컴의 취재 요청을 받고 있는 이순재는 연극 '사랑해요, 당신'과 함께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의 전국 순회공연도 준비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노인 역할은 아무래도 인생의 끝자락이다. 젊은 시절 화려한 인생을 살았을 노인 중 현재 유복한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에 놓인 노인들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을 가져야 하지만, 홀몸노인 등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못하면서 문제를 안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면서 "영화 '덕구'도 그렇고 이번 연극 '사랑해요, 당신'은 우리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생기는 노인 문제와 함께 노인의 고독감 등 매우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와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레 화제는 연극 '사랑해요, 당신'으로 옮겨갔다.
"공연을 하다보면 관객의 반응을 읽을 수 있어요. 지난해 공연 후 '관객들이 동의하고 있고 호감과 충족감을 안고 공연장을 나서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에서 강조하는 게 '나이 들면 부부뿐'이라는 건데, 공연장을 찾은 한 부부의 영감님이 공연장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앞으로 나 잘할게'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실적 주제에 관객이 공감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재공연에 대한 기대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느꼈습니다."
치매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병적 조건이다. 사회적으로 치매에 대한 관심이 높고 당국에서도 많은 연구를 한다. 작품에선 일상화된 병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요건은 가장 가까운 부부임을 강조한다.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절절한 사연들이 나타납니다. 비록 친족이지만 아들이라는 제3자가 나오는데, 아들은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자고 주장하죠. 하지만 아버지는 '내 아내를 내가 아니면 누가 책임지나'라고 말하며 아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는 어려운 병일수록 같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챙길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가천대 길병원과 함께하는 연극'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에서 병원 측은 자문과 함께 제작 후원을 했다.
또한 노령의 부부 역을 제외한 젊은이들 역할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학생들이 맡았다. 작품의 연출은 이재성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교수가 했다.
이순재는 2012년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설립 때 석좌교수로 부임했으며 현재 매년 4학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2008년과 2009년 가천대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죠. 2012년 연기예술학과 설립 전에 자문을 구하셨고, 교수직 요청도 있었습니다. 사실 총장님의 경우 이전부터 여·야를 떠나 정치권에서도 욕심을 냈던 분이셨죠. 하지만 선을 확실히 긋고 학교와 병원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분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요청에 응했습니다. 교육은 뒷전이고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여타 학교 재단의 오너들을 본 적이 있는데, 오너의 열정 여부에 따라 학교가 확 달라지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배우 이순재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화술'이다.
"제게 주어진 수업시수가 1주일에 4시간인데,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학생들과 만나서 공연 준비를 하고 학기 말에 작품을 무대에 올리죠. 기성 극단원들도 2~3개월은 연습해서 무대에 올리는 형태고 우리 학생들도 그 정도 기간은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화술'입니다. 최근 연기 현장에선 언어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연출자가 언어에 대한 정확한 발성을 지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죠. 소통만 하면 된다는 건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확한 발성이 이뤄지지 않으면 특히 고전 등 문학성과 철학성이 함유된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습니다. 배우는 가장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자기 나라 표준어를 구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체 모를 언어들이 떠도는데 이런 말들은 조만간 소멸할 것이고 표준어는 도도하게 남을 것입니다. 배우는 어떤 지역이나 계층이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발성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학생 때 다져놓으면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자신감 있게 연기할 수 있는 재산으로 남을 것이고요."
대학 시절 연기가 좋아서 연기를 시작한 이순재의 연기 인생은 어느덧 62년 차로 접어들었다. 한 포털의 기준으로 이순재는 영화 129편, TV 프로그램 106편, 공연 59편에 출연했다.
"오래 연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수단(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죠(웃음). 딴따라로 멸시받는 때였지만, 대학생 때의 맑고 순수한 눈에 연기는 확실한 예술 창작으로 여겨졌습니다. 내부보다는 주로 외국 명인들의 활동과 성과를 봤을 때 확실한 예술이었습니다. 배고프고 멸시를 당해도 해볼 만한 작업이었죠. 예술 창조 작업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좋아서 했고, 당대 인정 못 받아도 후대에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듯이 연기를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건 예술적 완성으로 관객에게 평가받고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송 관계자들에게 "늙은이들 갖고 시트콤을 만들어봐라"고 제안한다는 이순재는 "젊은이는 다소 단편적이지만, 노인의 경우 극적이고 복합적"이라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얼마든지 담아낼 수 있는 노인 테마는 흥행에 소외된 카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돌아봤을 때 반응도 괜찮았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배우 이순재는?
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1954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며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1971년 제1대 연기자협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수상을 시작으로 10여차례에 걸쳐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현재 ▲가천대학교 예술대학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SG연기아카데미 원장 ▲제3기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촉위원으로 있으면서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