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다.
온 나라가 정상회담 분위기에 푹 빠져 있다. 그동안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그때마다 온갖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 6·15 남북공동선언은 '자주적 통일'이 핵심이다.
통일의 방법으로 남한은 '연합제'를, 북한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제안했다. 연합제는 남과 북이 각각 독립 국가로서 단계적으로 협력 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국방·외교권은 남북이 각자 가지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표방했다. 북한의 연방제는 지역 정부에 국방과 외교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북한의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를 표방하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두 정상은 흡수·적화 통일을 사실상 포기하고 인도적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기로 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모았다.
■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
= 10·4 남북정상선언은 기본적으로 6·15 남북공동선언을 적극 구현해 나가고,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하는 데 있다.
또한 남과 북은 종전선언을 위한 3~4자 정상회담 개최로 불필요한 긴장을 종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밖에 해주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 공동어로구역·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에 두 정상이 합의했다.
또한 개성공업지구 1단계 조기 완공 및 2단계 개발 착수,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수송 시작,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 이용,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등 비교적 구체적인 합의도 이끌어냈다.
출발 전 아침식사 얘기 등 시시콜콜한 농담도 보도
'통일문제 우리 민족끼리 해결' 6·15 남북공동선언
교류·협력 합의도… 작별인사 세 차례나 포옹 눈길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평양)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25분께 평양 순안공항. 김대중 대통령이 탑승한 특별기가 도착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도부와 함께 공항에 등장했다.
'꽃술'을 흔들던 평양시민들의 '만세' 소리가 공항에 울려 퍼졌다. 특별기에서 내린 김 대통령이 잠시 서서 승강기 아래 카펫 중앙에 선 김 국방위원장과 눈인사를 나누자 김 국방위원장은 박수로 화답했다.
김 대통령이 내려오자 김 국방위원장은 서너 걸음 앞으로 나왔다. 두 정상은 손을 맞잡고 곧 환하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분단의 한(恨)을 넘어 통일의 첫 불씨를 품은 남북 정상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경인일보는 2000년 6월 14~16일자에서 두 정상의 시시콜콜한 농담까지 세세하게 보도했다. 국내 언론과 외신의 예상과 달리 회담 대부분이 그대로 공개됐다. 가히 파격적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첫날 오전 11시 45분께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 대통령에게 "오늘 아침 비행장에 나가기 전에 TV를 봤습니다. 공항을 떠나시는 것을 보고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김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계란 반숙을 절반만 드시고 떠나셨다고 하던데, 구경 오시는데 아침 식사를 적게 하셨나요"라고 물으니 김 대통령이 "평양에 오면 식사를 잘할 줄 알고 그랬습니다"며 웃기도 했다.
김 국방위원장은 "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남쪽에서는 광고만 하면 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리만 추구하면 됩니다"라며 남한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감 없이 전달하기도 했다.
두 정상은 첫날 바로 열린 1차 회담에서 '핫라인' 설치 의견에 접근하는 한편 경제협력, 이산가족 상봉, 통일을 위한 구체적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날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놓고 외신은 "이제 통일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냐"며 크게 주목했다.
하루 뒤인 14일 열린 2차 회담에서는 ▲남북 간 화해 및 통일 ▲긴장 완화와 평화정착 ▲이산가족 상봉 ▲경제·사회·문화 등 4개 부문에서 교류·협력하기로 합의를 했다.
다음날 두 정상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하고 2박 3일의 역사적 회담을 마무리했다.
당시 경인일보 1면 사진 기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헤어지기 전 세 차례나 포옹을 하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남·북 대결시대는 끝났다'는 기사의 제목처럼 6·25전쟁 이후 한반도에 처음으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된 것 자체가 큰 결실로 평가됐다.
포괄적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10·4 남북정상선언
안상수 시장 "가장 큰 혜택 누릴 것" 후속조치 발표
11년 흐른 오늘, 北 최고지도자 처음 남한 땅 밟아
#노무현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평양)
이로부터 7년 후에야 남북 정상은 다시 손을 맞잡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10월 2~4일)은 무엇보다도 인천이 대북 교류의 전진 기지로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 시초가 됐다.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함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 조성, 평화수역 설정이라는 합의 사안 모두 인천 앞바다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2일 낮 12시 정각, 평양 4·25문화회관 광장. 광장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하기 5분 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와 기다렸다.
노 대통령은 천천히 차에서 내린 후 시민들의 열렬한 '만세' 환호를 받으며 김 국방위원장을 향해 걸어갔다. 얼굴을 마주 본 두 정상은 손을 꼭 맞잡았다.
이튿날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다시 만나 "전날 아주 성대히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위원장께서 직접 나오셨었죠"라며 감사를 표하니 김 국방위원장은 "환자도 아닌데"라며 특유의 유머 감각을 다시 발휘하기도 했다.
3일 두 정상은 오전·오후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열고, '포괄적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10·4 남북정상선언에 합의했다.
4일 두 정상은 선언문을 통해 ▲종전선언을 위한 3자 혹은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정상 수시회동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 조성·북방한계선(NLL) 평화구역 설정 등을 약속했다.
가장 주목받은 도시는 인천이었다.
경인일보 2007년 10월 5일자 1면 '인천, 정상회담 가장 큰 혜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안상수 전 인천시장은 10·4 선언 직후 기자간담회를 열어 "남북 정상회담 성과의 가장 큰 혜택은 인천이 누릴 것"이라며 공동 어로에서 잡은 수산물로 인천을 물류·가공 기지로 해 상품화하고 개성~강화를 연결하는 구상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이번 4·27 정상회담은 처음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대한민국의 땅을 밟는다는 점에서 이전 두 회담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제 오늘, 남쪽의 대통령과 국민들이 북녘에서 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따뜻하게 반겨줄 차례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통일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