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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부두에서 유람선을 타고 40여분을 가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는 팔미도에 도착한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세기 초 日 강요 못이겨 처음 건설한 팔미도 등대 '제국주의 길잡이' 아픔
한국전쟁 등 거치며 10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불밝히다 신등대에 바통 넘겨
일반 주민은 없는 섬, 2009년 등대해양문화공간 조성되면서 민간에 첫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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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깜깜한 어둠을 뚫고 반짝이는 등대.

어둠 속 길을 잃은 배에게는 안내자가 되고 길고 긴 항해를 마무리하는 배에게는 곧 찾아올 휴식을 알려주는 희망과 같은 존재다.

인천 앞바다 팔미도에는 1903년 6월1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불을 밝힌 등대가 있다. 지난 4일 오후 팔미도 등대를 찾았다. 팔미도 등대에 가려면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이용해야 하는데, 미리 일정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황금색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달린 196t급 유람선 '금어호'에 20여 명의 관광객과 함께 몸을 실었다.

오전 치과 진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다는 해군 병사도 있었다. 팔미도에는 등대를 관리하는 항로표지관리원과 군인만 산다. 일반 주민은 없다.

2009년 '등대해양문화공간'이 조성되면서 처음으로 민간에 개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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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바다에서 배들의 항로를 안내하는 팔미도 등대의 등명기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배를 탄 지 1시간가량 지나 팔미도 부두에 도착하니 정창래(56) 팔미도 항로표지관리소장이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팔미도 등대의 정식 명칭은 '인천지방해양수산청 팔미도 항로표지관리소'로 정 소장과 다른 항로표지관리원 2명이 교대로 근무한다.

등대에는 모두 3명이 일하는데, 20일을 근무하고 뭍으로 나와 9일을 쉰다고 한다. 1명이 쉬는 동안 섬에 남아 있는 2명이 상주하며 12시간씩 교대로 일한다.

20일을 등대에 묶여 있다 보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정 소장은 "정말 큰 일을 제외하고는 가족이 아프거나 다치는 등 '아주 사소한' 일로 근무를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웃었다.

정 소장은 1995년 공채로 입사한 지 23년이 됐다. 인천항부두관리공사에서 8년 정도 일했는데, 안정적인 공무원 신분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친지의 권유로 입사하게 됐다.

그는 등대에서 일하는 항로표지관리원들이 '등대지기'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살짝 귀띔했다. "전문 자격증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항로표지'라는 말은 일반인이 잘 모른다. '항로표지를 설치하고 이를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관리해 해상교통의 안전을 도모하고 선박 운항의 능률성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항로표지법을 보면 항로표지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법 2조는 항로표지를 '등광(燈光)·형상(形象)·색채·음향·전파 등을 수단으로 항(港)·만(灣)·해협(海峽), 그 밖의 대한민국의 내수·영해 및 배타적 경제수역을 항행하는 선박에 지표가 되는 등대·등표(燈標)·입표(立標)·부표(浮標)·안개신호(霧信號)·전파표지·특수신호표지 등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정 소장의 안내를 받아 등대보다 한참 아래에 마련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등대로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르다 보니 단층 목조 '팔미도 등대 옛 사무실' 건물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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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 사무실이 잘 보존 되어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03년 팔미도 등대 점등 이후 지어져 1962년 5월 사무실을 신축 이전하기 전까지 이용됐다. 이후에는 팔미도 주둔 해군 병사의 교회로 이용했다고 한다.

내부는 항로표지관리원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과 옛 등대일지, 시계, 통신기, 일본에서 만든 구형 테스터 장비 등으로 꾸몄다.

이 가운데에는 정 소장이 입사 직후 팔미도에 처음 발령받아 실제 사용했던 물건도 있다고 한다. 팔미도는 그의 첫 발령지이고 이번이 두 번째 근무다.

사무실 안에 걸린 가족사진에 눈이 머무르게 됐다. 옛날에는 항로표지관리원 가족들이 등대에 함께 머무른 경우도 많았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자녀들이 섬을 나오면 인천 자유공원 근처에 있는 '등대직원합숙소'에서 돌봐줬다.

지금으로 따지면 직장어린이집과 비슷한 보육 시설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인천해수청 직원들의 관사로 용도가 바뀌었다.

언덕을 마저 오르니 작은 등대와 큰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등대를 '구 등대'라고 부른다. 이 작은 등대가 1903년 6월1일 불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다.

정 소장은 "등대와 붙어있는 돌담도 옛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큰 등대는 2003년 팔미도 등대 점등 10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 종합정비사업'에 따라 새롭게 지어진 '신 등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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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1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팔미도 구 등대는 우리나라 항로표지의 효시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하다. 2002년 2월4일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됐다.

그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항로표지의 설치와 관련 업무는 어떤 해사 업무보다도 일찍 근대화된 편이다.

서세동점의 시기 인천항은 서양, 중국, 일본의 배들이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다. 그 가운데 팔미도는 인천항 도착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섬이다.

지도를 보면 금방 이해하게 된다. 배가 인천항에 들어오려면 뱃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덕적군도와 자월도를 지나 무의도와 영흥도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북서쪽으로 방향을 크게 바꿔야 하는데, 팔미도가 딱 뱃머리 방향을 바꾸는 '변침점'에 있다.

서해 특히 인천 앞바다에는 무수한 섬과 암초가 있고, 또 조석 간만의 차가 컸다. 해류가 급격하게 변하고 해상 사고도 빈번했다.

포항에는 우리나라 등대 역사가 망라된 국립 등대박물관이 있다. 전만희 국립 등대박물관 학예사는 "열강의 자국 선박들이 안전하게 조선을 드나들기 위해서는 등대가 필수적이었다. 열강은 조선에 등대를 요구했고, 팔미도에 등대가 만들어진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팔미도·소월미도·북장자서·백암에 등대 건설에 들어가 1903년 6월 완공했다.

우리나라 등대가 조선으로 몰려오는 세계열강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민속학자이자 해양문화사가인 등대 전문가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우리나라 등대를 '제국의 불빛'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형님인 '꼬마 등대'와 100살 차이가 나는 아우인 '거대한 최신식 등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옛 등대와 지금 신식 등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은 전기로 작동하지만 과거에는 석유 연료로 등댓불을 밝혔다. 정 소장은 "선배들은 불을 밝히기 위해 매일 석유통으로 짊어지고 날라야 했는데, 눈이나 비라도 내리면 무척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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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시작되자 정창래 팔미도항로표지관리소장이 등대 꼭대기에 있는 등명기를 점검 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등대는 일몰 3분 후 점등해 일출 3분 전 소등하는 것이 원칙이다. 예전에는 매번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야 해 번거로웠지만, 지금은 자동화 시스템으로 작동된다.

20년 치 일출·일몰 시각이 입력돼 있어 점등과 소등에 신경 쓸 일이 없다. "혹시 자동화 이전 시절에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경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정 소장은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웃었다.

현재의 팔미도 등대는 대형 회전식 등명기와 전망대, 100주년 기념 상징 조형물, 위성항법보정시스템 기준국 등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등대의 불을 밝히는 등명기는 국내 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 등명기로, 50㎞까지 비추며 10초에 1번씩 번쩍인다.

정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린 '팔미도 등대'에서 근무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팔미도 등대가 10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을 밝혔고,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인 공헌도 했다"며 "제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팔미도 등대가 배들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제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