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상대, 버린카드였던 이동석
무4사구 기적의 투구로 '깜짝 승리'
하지만 점수와 안타 외에 4사구나 실책으로라도 한 명의 주자도 살려 내보내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한다면 퍼펙트게임(perfect game)이라는, 한 층 더 명예로운 기록이 만들어진다.
노히트노런을 달성한다고 해서 투수에게 2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당한다고 해서 상대 팀이 2패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나오는 기록이 아니다보니 삼십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도 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언급되고 되새겨진다.
1988년에는 두 번의 노히트노런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순간에 튀어나온 의외의 기록이었고, 또 노히트노런 치고도 자주 보기 어려운 희귀한 기록들이었다.
그 희귀한 이변이 시작된 것은 시즌의 출발점인 4월 2일이었다. 그날 사직 개막전의 OB 베어스 선발로 내정되어있던 김진욱이 경기 당일 오전 연습 때 동료 타자 김광림의 연습타구에 급소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김진욱을 대신할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은 장호연이었다.
그 무렵 OB 안에서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김진욱이었다면, 반대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장호연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당대의 해설가들이 미처 따라가며 이름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만루에서 4번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조차도 '이깟 공놀이쯤'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으로, 혹은 열 살짜리 아들에게 배팅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싱글거리고 이죽거릴 수 있는 별난 여유가 있었다.
그 날의 투구가 그랬다. 장호연은 거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공이 없을 만큼 빙빙 돌며 '낚시질'을 했고, 롯데 타자들은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앞 다투어 초구와 2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속 120키로미터 후반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들이 딱 배팅볼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또 그 날 갑자기 등판하느라 제대로 컨디션을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라는 약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볼 넷이 두 개, 몸에 맞는 공이 한 개 있었지만 병살타 역시 두 개 기록되며 타석 수는 28이었고, 투구수도 딱 99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점수 0, 안타 0. 삼진도 실책도 0. 노히트노런, 그것도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이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기록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보름이 지난 뒤, 이번에도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4월 17일, 광주 무등야구장. 3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던 자타공인의 최강팀 해태와 그 해 역시 탈꼴찌 싸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 창단 3년차의 신생팀 빙그레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더구나 해태의 선발은 '천하의' 선동열이었고, 그 선동열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이 선동열의 맞상대로서 미련 없이 버린 카드는 2년차 신인투수 이동석이었다.
선동열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그날 그는 이강돈, 유승안, 강정길에 이정훈과 장종훈이 가세하며 힘이 붙기 시작하던 빙그레 타선을 상대로 무려 11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며 9이닝을 완투했고, 점수는 단 한 점만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시즌 2패째를 당하며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맞상대했던 이동석이 덜컥, 또 한 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동석이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장호연의 것보다도 더 놀라운 면이 있었다. 바로 '무4사구 노히트노런', 즉 단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 개의 볼 넷이나 몸에 맞는 공도 내주지 않는 기적적인 투구였기 때문이다.
그 해 이동석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7승을 올리며 한 몫을 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기존의 한희민, 이상군에 더해 이동석, 김홍명, 김대중, 김용남 등의 투수들이 전반기에만 54경기중 20경기를 완투한 대활약을 토대로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 이후 이동석은 다시는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성적이나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7년만에 프로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김은식 야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