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중기 현재 서울에 '남경' 건설
파주·고양 경유 노선 이용 활성화
예종, 혜음령에 숙박시설 '원' 설치
1122년 완공·재공사 후 행궁 마련
국왕 거처 사용·나그네 식량 도움
김부식, 보수 기념 '혜음사신창기'
기록상으로만 '존재' 전해져 오다
1999년 '기와' 발견되며 발굴 진행
역은 원래 공무로 여행하는 여행자와 행정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설치됐다. 역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고급관리나 지체 높은 승려들이었다.
하급 관리들은 공무라 해도 이용의 제한이 있었다. 사실 고급관리나 지체 높은 승려들과 같이 역에 머물러 보았자 뒤치다꺼리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런 하급관리나 일반인들이 역도를 따라 여행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시설로 원이 있었다.
원은 원래 절에서 일종의 대민시혜를 목적으로 설립해 여행자는 물론 행려병자, 가난한 백성 등도 구휼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가 원의 설립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중기에 현재의 서울에 남경을 건설했다. 개경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이 중요 교통로로 부상했으며 교통체계도 변했다.
원래 개경에서 남쪽,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은 개경에서 장단을 거쳐 적성과 양주를 지나는 길이다. 그런데 고려 중기부터 남경이 개발되면서 개경에서 남경에 이르는 길은 파주와 고양을 거치는 노선이 더 활발히 사용됐다. 개경과 남경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증가했다.
하지만 새로운 남경길에는 민간여행자가 안전하게 통행하고 묵어 갈수 있는 교통시설이 빈약했다.
특히 혜음령 일대는 인적이 드물고 도적떼가 많아 통행에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다. 혜음령은 여행자를 노리는 도둑들의 소굴이 됐다. 무엇보다 여행객의 안전과 숙박을 보장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여행자를 노리는 불한당들을 쫓아낼 방도가 필요했다.
1120년 고려 예종은 측근 신하 이소천에게 현재의 파주시 용미리 혜음령 고개 부근에 원을 축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소천은 국왕의 명을 받고 응제, 민청 등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약 2년 만인 1122년에 혜음원을 완성했다.
하지만 혜음원은 완공되자마자 다시 재공사에 들어갔다. 국왕이 남경에 행차할 경우 국왕이 머물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국왕의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재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가 끝나자 별원(행궁), 절, 원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 혜음원이 완성됐다. 사용되는 집기와 여행자들에게 공급되는 식량은 왕실에서 도움을 줬다. 그러나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치적 혼란에 처하게 됐고, 혜음원은 운영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예종 때와 달라진 환경에서 운영난을 극복할 묘책을 찾기 어려웠다. 혜음원이 다시 왕실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은 1140년 이후로 추정된다.
이번에는 인종의 비 공예태후 임씨가 왕실 지원을 주도하였다. 왕실의 주도로 혜음원은 다시 활기를 찾고 대대적인 보수도 이루어졌다. 김부식은 이를 기념하여 '혜음사신창기'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혜음원은 기록에만 전하여 올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1999년 '혜음원(惠蔭院'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지금의 혜음원터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단계적으로 혜음원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혜음원의 전체 규모와 구조 및 역사적 성격이 밝혀지게 됐다.
혜음원의 전체 면적은 약 2만3천930㎡이다. 산 능선을 계단식으로 깎고 다져서 모두 11단의 건물터를 조성했다. 둘레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을 설치해 외부와 구분했다.
담장 내부에는 현재까지 조사 결과 총 37동에 달하는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터의 배치와 구조 및 출토되는 유물은 개성의 고려 궁터 '만월대'와 아주 유사하다. 이 밖에 계곡의 물을 끌어서 연못과 물을 활용한 조경시설을 건물지 사이사이에 배치한 것도 주목된다.
마치 혜음원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