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부터 정치적 대립을 떠나 남북 축구 교류를 추진하는 등 체육 교류의 명맥을 이어온 (사)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 이사장.

中 전지훈련장 지원 계기, 10년 이상 교류대회 개최 등 北 축구발전 노력 결실
남북 대치상황속 유소년들 우정… 북측 신뢰 33만㎡ 부지 무상이용 허가 받아
남북·북미 정상회담 기회로 정치개입 뛰어넘어 '스포츠 기본조약' 체결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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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15년 만에 평양과 서울에서 통일 농구 경기를 연다.

또 오는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남북이 공동으로 참가하는 등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공동 입장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이어 남북체육 교류가 결실을 맺고 있다.

남북 체육 교류는 그동안 군사적 대치와 냉전 속에서도 풀뿌리처럼 이어왔다. 물론 남북 체육 교류의 중심은 김경성(59) (사)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한해 5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한 체육 교류를 지켜온 인물이다. 김 이사장은 '북한 사람', '외곬의 사업가' 등 애칭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이사장은 남북 공식 채널이 무너지고 정치적 해법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축구 교류를 이어왔고, 지난 2015년에는 최전방 서부전선인 연천 지역에서 포탄을 주고받는 등 남북 관계가 악화 일로를 맞고 있는 가운데 평양에서 국제 유소년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은 평양 축구대회를 가로막지 못했다. 축구공이 총과 칼보다 먼저였다"면서 "지난 10여년간 남북 축구 교류를 이어오면서 희망과 좌절을 경험했다.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말했다.

김경성 초대소
평양 능라도에 위치한 '김경성 체육인 초대소' 모습. /남북체육교류협회 제공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역사적인 남북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단일팀이 꾸려졌고, 북한의 참가는 '평화올림픽'의 업적을 만들었다.

또 평화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됐다. 4월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6월에는 북미정상회담까지 탄탄대로였다.

그럼에도 김 이사장은 불안감을 내비쳤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앞으로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경제협력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면서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 스포츠 기본 조약 체결이 먼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거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더라도 남북이 스포츠로 교류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스포츠 교류만큼 정치가 개입되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지난 1970년대 동서독은 스포츠 기본조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스포츠 교류만큼은 냉전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치고 입국하고 있는 경기도 선수들의 모습.

#김 이사장은 어떻게 남북 교류를 해왔을까.

그는 1990년대 보험업에 뛰어들었고, 금융보험서비스 업체를 직접 운영하면서 신촌로터리 빌딩까지 보유할 정도로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김 이사장을 축구계로 불러들인 것은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였다. 한일월드컵 때 한 정당의 월드컵 홍보 단장을 맡은 그는 이후 고향에 세워진 포천축구센터 이사장을 맡았다.

전지훈련이 필요하다는 코치진의 제안에 중국 윈난성 쿤밍을 현지답사한 김 이사장은 이후 중국의 담배제조 업체인 '훙타스포츠클럽'의 축구장을 임차해 각국 축구팀의 전지훈련을 유치했다.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최종예선에 참가한 북한 대표팀과의 만남이 대북사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중국 윈난성 축구협회 명예 주석직을 맡았던 김 이사장은 2005년 이란, 일본, 바레인과 2006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맞서게 된 북한 대표팀에 전지훈련 지원 의사를 제안했다.

그는 "북한 관계자가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 남한 출신임을 알고 잠시 꺼렸지만 이내 나의 진심에 수긍했다"면서 "이후 북한의 청소년 축구와 탁구, 마라톤 등 다른 종목까지 지원의 폭을 넓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2006년 5월 북한을 대표하는 4·25체육단과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이 '남북체육교류계약'을 맺었다. 이는 북한이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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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을 북한 정부가 신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김 이사장이 북한 축구 발전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 U-20 여자대표팀 아시아 최초 월드컵 우승(2006년), U-17 여자대표팀 월드컵 우승(2008년), AFC U-19 챔피언십 우승·남자대표팀 남아공 월드컵 출전(이상 2010년), 동아시안컵 여자축구 우승(2013년) 등 북한 선수들의 쿤밍 전지훈련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김 이사장은 "민간 차원의 대북 교류는 정부 승인하에 이뤄진다"며 "남북 체육 교류는 민간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정치는 절차가 복잡하고, 정권이 바뀌면 책임까지 지게 돼 소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남북한은 지난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2009년 북한 2차 핵실험, 2010년 천안함 사건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2006~2018년 6월까지 12년 동안 남북한에서 12차례, 중국에서 8차례 등 축구교류 사업을 계속했다.

그는 "2007년 북한 청소년대표팀의 남한 전지훈련을 이뤄냈고, 2011년부터 중국의 쿤밍과 하이난, 광저우에서 인천평화컵 국제유소년대회를 개최했다"면서 "2014년부터는 개성공단 폐쇄로 가동이 중단된 평양의 축구화 공장을 중국 단둥으로 옮겼고, 제품명인 '아리'를 바탕으로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대회'를 연천과 북한의 평양, 중국의 쿤밍에서 차례로 개최했다"고 밝혔다.

특히 2015년 8월21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제2회 아리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는 남북 갈등 상황 속에서도 축구를 통한 남북 유소년들의 우정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휴전선에서 북한의 목함지뢰가 폭발했고 8월20일에는 남한의 대북 확성기 가동을 이유로 남북 양쪽에서 포격이 벌어지는 등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김 이사장은 "당시 정부에서 선수단을 철수시키라고 연락받았지만, 남북 양쪽 모두를 설득해 대회를 치렀다. 21일 경기도 대표팀과 중국 유소년팀, 강원도 대표팀과 우즈베키스탄 유소년팀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지난 2015년 8월 남북 갈등 속에서도 열린 제2회 아리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 평양 개막전 모습

김 이사장은 평양에서도 인기가 높다.

북한은 2007년 한국에서 열린 U-17 청소년월드컵 조추첨식에 북한의 공동단장 자격으로 김 이사장이 직접 추첨하도록 했고, 평양 능라도에 '김경성 체육인 초대소'(호텔)를 짓기도 했다. 게다가 평양에 33만578㎡(약 10만평) 땅을 50년 무상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기도 했다.

이런 북한의 신뢰와 인적 네트워크는 김 이사장의 역할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 이사장은 "축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남북 체육 교류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나를 도와준 많은 (남북)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 이사장은 북한 프로축구 선수가 국내 K-리그에서 뛰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남북 축구의 프로축구 팀들이 정기 교류전을 펼치고 북한 선수를 남한 프로팀에 입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북한의 축구리그는 1~3부로 돼 있는데 1부인 갑급 연맹전에는 4·25팀, 소백수팀, 기관차팀 등 12개 팀이 소속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과 대만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 체육을 통해 정치적 문제가 해소되고 나아가 통일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신창윤기자 shincy21@kyeongin.com 사진/경인일보DB

김경섭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김경성 이사장은

▲1959년, 포천

▲경기대학교 한반도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고양시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체육위원회 위원장

▲경기도청 균형발전기획실 통일기반조성담당관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수상

▲DMZ평화상

▲천지인상 평화통일인상

#저서

▲'불굴의 아리랑'(북스타)

▲'포화 속에 핀 평화의 꽃, 벽을 넘어서'(북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