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찬 18년째 독립유공자 추서 반려6
독립운동가 故 한재수 선생의 아들 한희찬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내몽골서 동광학교 설립 투사 양성
자료 미비·행적불분명 이유로 반려
"일본 관동군 출신도 포상 받는데…"


"독립투사 양성소를 세워 독립운동을 하신 내 아버지를 외면하는 광복절이 서럽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피해 중국 내몽골자치구 우란호트시로 이주한 고(故) 한재수(1903년생) 선생의 막내 아들인 한희찬(70·수원 인계동)씨는 15일 광복 73주년·정부수립 70주년 기념식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씨는 지난 2000년부터 햇수로 18년째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사항을 적어 국가보훈처에 접수하고 있다.

故 한재수 선생은 1929년 고향인 경북 영천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뒤 내몽골 왕예묘(현 우란호트시)로 옮겨 조선인민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1931~1932년 사이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봉생 선생이 교편을 잡은 동광학교를 세우고 교감직을 맡아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며 '항일해방전쟁'을 주도할 독립투사들을 양성했다.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 45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일본 영사관원의 감시를 피해 황포군관학교로 피신한 안봉생 선생과 선전물을 주고받았는데 이 선전물을 조선인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다 발각된 것이다.

또 인근에 사는 조선인들을 위한 농장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지방정부와의 마찰이 생기자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살아난 역사가 남아있다. 광복 이후에도 내몽골에 남은 그는 1981년 3월 숨졌다.

한 선생에 대한 기록은 1995년 3월 내몽골대학출판사가 편찬한 '내몽골 조선민족'과 쇼와 10년(1935년 4월 5일) 재정가촌(만주국 흑룡강 일대) 일본제국 영사관의 기밀 166호 문건 등에 담겨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한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십수년째 반려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서 국가보훈처는 '활동 당시의 객관적인 입증자료 미비, 1930년대 이후 사망시까지의 행적 불분명'을 명시해 한씨에게 통보했다.

한씨는 "국가보훈처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그곳에 가서 아버지의 지나온 길을 들여다 봐줬으면 좋겠다"며 "일본 관동군으로 활동하던 이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는데, 왜 내 아버지만 홀대를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