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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에 가장 중요한 고객 가운데 하나는 배를 운영하는 선사다. 인천항은 선사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인천항에는 28개 선사가 49개의 정기 컨테이너 항로서비스를 개설하고 인천과 중국·대만·홍콩·미주·호주 등의 항만을 연결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오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에 도착한 흥아해운의 1천740TEU급 컨테이너선 '흥아그린'호의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외국과의 수출·입 물류 99% 차지하는 선박 직접 운용
28개회사 132척, 中·美·아프리카 등 매주 54차례 누벼

개항이후 외세가 장악… 국권회복까지 자산 모두 잃어
1949년 대한해운공사 설립해 국적선 운항·경쟁력 쌓아
작년 컨물동량 300만TEU 돌파·세계 40위권 도약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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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7시 50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에 1천74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급 컨테이너선 '흥아그린'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항에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28개 선사 가운데 하나인 흥아해운(인천영업소) 김진구(31) 계장은 이 모습을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김 계장은 "긴 항해를 마친 배가 안벽에 붙는 순간은 수십 년씩 부두에서 일한 이들도 긴장하는 때"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지만, 항상 부두에 나와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계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입항 수속이다. 배가 부두에 오기 전에는 세관 승인이 정상적으로 완료됐는지 확인하고, 배가 도착한 뒤에는 배에 올라 선원 명부와 이들의 여권이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오전 8시 접안이 완료되고 배와 부두(육지)를 연결하는 계단(갱웨이·Gang Way)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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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위해 배에 오르는 항운노조 조합원.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도선사가 내리고 질병관리본부 국립인천검역소 직원 2명이 배에 올랐다. 김 계장도 함께 배에 탔다.

컨테이너 고정 장치를 풀기 위해 부두에 대기 중이던 '라싱맨'(Lashing man) 16명이 달라붙어 컨테이너에 붙은 모든 고정 장치를 30여 분 만에 제거했다.

곧 크레인의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시작됐다.

흥아그린호는 지난 14일 중국 세코우(蛇口)를 출항해 이날(18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인천항에 컨테이너 300TEU를 내리고 400TEU를 실었다. 인천, 부산, 광양, 상하이, 마닐라, 호찌민, 홍콩, 세코우를 운항하는 이 배는 3주에 1차례씩 인천항을 이용한다.

배가 항만을 이용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선사는 이 배를 직접 운용하며 화물이나 승객을 운송한다. 항만의 가장 중요한 VIP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항만 개념은 부두시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류업체나 제조기업이 입주한 항만 배후부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항만이 제공하는 서비스도 과거와 비교해 넓어졌지만 제한된 의미에서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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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장치를 풀고 있는 항운노조 조합원.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현재 인천항에는 28개 선사가 정기 컨테이너 항로를 개설하고 활동 중이다. 이들 선사는 중국, 대만, 홍콩, 일본,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미주, 호주 등과 인천항을 연결한다.

49개의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를 운영 중인데, 132척의 배가 투입돼 매주 54.75차례 인천항을 이용한다.

인천항이 304만8천TEU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며 전 세계 40위권 항만에 올라선 건 최근의 일이다.

우리나라 근대 해운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기인 1880년부터 국권피탈이 일어난 1910년 사이에 성립됐다. 강화도조약에 의해 1876년 부산항을 시작으로 원산항(1880년), 인천항(1883년) 순으로 개항이 이어졌다. 인천항에서 근대 해운업의 형태를 갖춘 선사들이 활동한 것은 1883년 이후다.

근대 기선을 도입한 조선의 국제해운 업무는 1883년 설립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조직이 관장했고, 조직 설립 초기부터 정기적인 국제항로 개설에 주력했다. 영국, 청나라, 미국, 독일 등의 선박 기항을 유치하는 형태였다.

인천시가 1983년 펴낸 '인천개항100년사'를 보면 기선을 이용한 인천항 최초의 국제정기항로는 1883년 청나라 국적 '난성'호가 월 1~2회로 상하이~인천을 운항한 것이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은 그해 해군함정을 파견했으며, 미쓰비시기선회사가 고베~인천을 월 1회 정기 운항했다. 청국의 난성호가 운항을 중단하자 미쓰비시기선회사가 인천항의 수출입품을 독점했다.

그 후로 미쓰비시기선회사와 교토운수회사가 설립한 일본우선주식회사의 선박이 1893년까지 인천 운항을 독차지했다.

1893년 2월에는 오사카상선회사가 인천 항로를 개설했고, 11월에는 러시아 동청철도기선회사가 이 항로를 연장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과 나가사키를 거쳐 인천에 가는 정기항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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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주(繫船柱)에 홋줄을 걸어 배를 고정하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인천도시역사관 배성수 관장은 "개항 이후 선사들에 의해 정기항로가 개설됐다는 것은 인천항이 무역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하지만 인천의 국제 정기항로는 일본우선주식회사와 오사카상선회사 위주로 일본의 비중이 높았고 조선의 기선이나 범선도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해 실제로 일본이 조선의 항해권을 장악했다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근대 해운은 전운국, 이운사 등의 설립을 통해 도입되긴 했지만 발전하지 못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암흑기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해운을 재건할 아무런 자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선박이나 선사를 운영할 만한 경험을 지닌 인사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 강점기에 상선에서 근무한 한국인 해기사들이 중심이 돼 조선우선주식회사(조선총독부가 1912년 설립한 연안해운사)를 인수하려는 노력이 본격화했다.

정부가 1949년 12월 설립한 국책회사 '대한해운공사'가 우리나라 해운을 이끈다. 반관반민의 대한해운공사는 민간기업의 외항 진출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국제무역 화물을 국적선으로 수송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해운의 국제적 공신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무엇보다도 백지 상태의 한국 해운에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중대한 토대를 제공했다.

인천항에는 28개 선사가 49개 항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선사와 인천항은 함께 성장했다. 배가 들어오며 항만이 확장·발전했고, 또 확장한 항만은 더 많은 배를 부르며 선사를 키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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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하역 장면.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현재 인천에서 대리점이나 영업소를 운영 중인 선사는 모두 11곳이다. 흥아해운, 천경해운, 고려해운, 동영해운, 동진상선, 두우해운, 범주해운, 장금상선, 태영상선, 한성라인, 현대상선 등이다.

현재와 같은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가 갖춰진 시기는 1974년 인천항 제2선거가 완공된 이후다. 이후 많은 선사가 항로를 개설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남흥우(66) 전 한국선주협회 인천지구 위원장은 "외국과의 화물 운송에서 선박이 차지하는 비율이 99%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선사는 수출입 화물 운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첨병 역할을 하며 인천항과 함께 성장했다"며 "이런 노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