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 성공하면 가족과 함께하거나 자신만의 '라이프(Life)'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지고, 반대로 행복을 좇다 보면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에 적응할 시간이 부족해져 성공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일이 과거에는 행복과 성공을 나누는 척도의 기준점이 되어 왔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물질만능주의에 지친 2030세대의 '라이프' 혁신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일과 행복이 삶의 균형을 이루는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
지난 1970년대 말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워라밸'은 1986년 미국에서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돼왔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제 막 '워라밸'이란 단어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워라밸' 지수에서도 우리나라는 38개국 중 35위를 기록했다.
정부에서도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듯 지난 7월 1일부터 종업원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나이가 어린 근로자들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기존 40시간에서 35시간으로 축소됐고, 하루 7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없다.
또 합의에 따른 연장 근로시간 역시 1주에 6시간에서 5시간으로 축소됐다.
일반 성인 근로자는 주당 8시간씩 5일 근무, 연장 12시간 초과 16시간까지를 합해 최장 허용 근로시간이 총 68시간이었는데 관련 제도 시행으로 앞으로는 주당 8시간씩 5일 근무에 시간 연장은 12시간으로 줄어 최대 허용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축소됐다.
이 때문에 퇴근 이후 헬스와 요가 등 운동을 하는 사람, 학원을 다니며 자기 계발을 하는 사람, 영화·공연 등을 관람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 등 퇴근 후 삶을 즐기기 위한 작지만 큰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발맞춰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산업 전반에 배치되고 있는 점도 '워라밸' 확산의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운전자 개입이 필요 없는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차가 일반도로를 달리거나 편의점, 카페 등에 AI를 결합한 무인서비스가 도입되면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인천국제공항 제 1·2여객터미널에는 음성인식 및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ICT 기술이 접목된 로봇 '에어스타(AIRSTAR)'가 안내를 돕고 있으며, 화성 동탄의 한 카페에서는 스마트폰 앱이나 키오스크(무인 종합정보안내시스템)를 통해 음료나 커피를 주문하면 '로봇 커피 바리스타'가 음료를 준비한다.
일과 행복을 찾기 위한 직업 선택 기준도 변하고 있다.
급여를 많이 주는 대기업 위주에서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 공무원 등 공직사회로 바뀌더니 이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자기만족도 중시 직업으로 선택의 폭이 확대되고 있다.
또한 자신이 평소 관심 있던 분야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거나 노동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등의 행복을 향한 도전이 시작되고, AI와 로봇 등 첨단기술 발달에 따른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삼성·LG·SK 등 국내 대기업들도 올해 AI와 로봇, 빅데이터, 5G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에 대규모로 인력 충원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은 아직 주어진 시간에 낯설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다. 일과 행복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워라밸'에 대한 인식과 시행 모두 초기 단계이다 보니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특히 대기업이나 공공근로자보다 급여가 적은 영세 중소기업 근로자나 소상공인들에게는 '워라밸' 확산이 더 멀게만 느껴지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라 근로시간이 줄어들면서 그만큼 급여도 줄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퇴근 후에도 생계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도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건비마저 오르면서 고용주와 근로자 모두 생계를 걱정할 처지에 놓였다.
고용주는 각종 물가 상승에다 인건비 상승까지 더해지면서 사업장 운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근로자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시간이 곧 '돈'인 이들에게는 '워라밸'이 현실과 맞지 않은 이상에 불과하다.
우리 일상에 자리 잡은 AI와 로봇도 일과 행복의 방해요소로 작용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AI·로봇 기반의 4차산업이 제1차 산업혁명 당시 일자리 감소의 최대 원인 중 하나인 증기기관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당시 증기기관의 발전으로 생산량이 증가하고 산업 발전 속도도 높아졌지만, 공장에서 일하던 유럽의 수십만 노동자는 거리로 내몰렸다.
4차 산업 시대에는 자동화와 무인화 도입으로 유통·물류·운수·제조업에서 현존하는 직업의 90%가량이 사라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이렇듯 일과 행복을 찾기 위한 직장인들의 도전이 안정된 궤도에 정착할 때까지는 수많은 고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불편함으로 행복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근로자가 생기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현 추세대로라면 '워라밸'은 작금의 트렌드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직장인들의 생활방식이 달라지고 있으며 20~30대 청년들은 취업 대신 미래를 향한 도전과 함께 행복 찾기에 나서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생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고 각광받는 직업들이 생겨나고 있다.
/김종찬기자 chan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