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안 게임 매 경기마다 간절함
금메달 아직도 실감 안나 얼떨떨
인천AG·리우올림픽 선발전 좌절
잇단 판정논란 '국내 최강자' 울분
짧은 방황후 다시 오뚝이처럼 재기
최대 고비 4강 北 최혜송 꺾고 영광
11월 세계선수권·2년뒤 도쿄올림픽
아시아 넘어 세계정상 '두주먹 불끈'

올림픽 금메달만 바라보고 샌드백을 두드렸다. 선수촌에서도 연습벌레로 통했다. 그의 스승은 "훈련량으로 치면, 전 세계에서 이 녀석만큼 열심히 하는 선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내에는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꿈꿔오던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그는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날 불현듯이 떠오른 생각. '올림픽 금메달이 전부는 아니잖아. 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훈련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도전한 그는 상대를 향해 마음껏 두 주먹을 날렸다.

치열한 혈투 끝에 마지막 3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손을 심판이 번쩍 들어 올렸다. 정적을 뚫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시아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국 여자복싱이 새 역사를 썼다. 오연지(28·인천시청)는 이달 초 막을 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복싱 남녀 대표팀을 통틀어 유일한 메달이다.
소감부터 물었다. 마음고생이 컸던 것일까. 오연지는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부담이 컸어요. 한 경기, 한 경기 간절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사실, 아시안게임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도 실감이 안 났죠. 아직도 얼떨떨해요."
오연지는 국내 대회를 평정했다. 가장 대표적인 전국체육대회에서 여자복싱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2011년 우승을 차지한 이후 지난해까지 7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라이트급(60㎏) 여성 복서들이 모이는 이 대회에서 한 차례도 금메달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주먹은 아시아에서도 통했다. 2015년과 2017년에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복싱 사상 최초로 2연패를 일궈냈다. 한국 여자복싱의 역사가 오연지의 주먹에 의해 쓰이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연지는 이달 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자카르타 국제 전시장(JIEXPO)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여자복싱 라이트급(60㎏) 결승에서 태국의 슈다포른 시손디에게 4-1(29-27 28-28 27-29 27-29 28-28) 판정승을 거두며,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오연지는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스승인 김원찬 인천시청 복싱팀 감독은 잘 안다. 김 감독은 오연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연지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해당 체급 국내 최강자답게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하며 울분을 삼켰다. 몸 담고 있는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그였다.
당시 오연지의 세컨드였던 김태규 인천시청 코치는 링에 올라가 항의하다가 최종 5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올림픽 출전이란 오랜 꿈도 바로 눈앞에서 놓쳤다. 오연지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선발대회 8강전에서 또다시 석연찮은 판정으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힘든 순간들을 잘 견뎌왔던 것 같아요. 특히 (리우) 올림픽은 정말 간절했거든요. 좌절도 했죠. 저의 오랜 꿈이었으니까…. 올림픽 출전을 위해 준비했던 시간을 떠올려봤는데, 금메달이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제가 흘린 땀이 더욱 값진 것이었어요."

오연지는 이를 악물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물론 이번 아시안게임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매 경기가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대진표를 확인한 김 감독도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16강(베트남 류띠듀엔), 8강(중국 양원루), 준결승(북한 최혜송)은 물론, 결승까지 오연지가 상대한 선수들은 모두 우승 후보들이었다.
최대 고비는 북한 최혜송과의 4강전이었다. 그는 지난해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 복싱대회에서 양원루를 3-2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였다. 오연지와 최혜송은 당시 대회에서 서로의 경기를 지켜보며 이번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왔다.
오연지는 전북 군산이 고향이다. 1988·1992년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인 외삼촌(전진철)이 운영하는 복싱 체육관에 놀러 갔다가 복싱과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오연지는 부모님(오광열, 전진순)의 만류를 무릅쓰고 군산상고에서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
오연지에게 복싱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도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연지의 머릿속은 벌써 올해 11월 세계선수권에 이어 2년 뒤인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향해 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상으로 가는 길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오연지가 한국 여자복싱 역사에 또 다른 획을 긋는 상상을 하니 은근히 마음이 들뜬다.

■오연지 선수는?
▲ 전북 군산 출생(1990년)
▲ 군산상업고등학교, 호원대학교 졸업
▲ 전국체육대회 7연패(2011~2017년)
▲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 2연패(2015·2017년)
▲ 2018 자카르타-팔렘방 AG 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