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발대발하는 부장님 면전에 조용히 사표를 건네고, 그동안 책상에 쌓인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난다.
집에 돌아와 배낭에 옷가지와 생필품 몇 가지를 대충 챙겨넣고 집을 나선다. 젊은 직장인들이 한번쯤 꿈꾸는 '퇴사 판타지'다.
월요병, 월급충 같이 온라인 세상에서 당장이라도 회사를 그만둘 것처럼 자신의 일상에 분노하지만, 정작 현실은 직장을 '때려치우는' 일에 용기가 필요하다.
밥벌이의 괴로움도 크지만, 저성장시대에 굶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만만치 않아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용기를 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그래서 우리는 남다른 용기로 회사를 때려치운 후, 용감하게 떠난 이들을 만났다.
# '백수라도 괜찮아'
일은 원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할 수 있지만 배낭여행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개미처럼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해 본 후에야 알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대기업에 근무했던 이고은 씨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것은 그 평범한 사실을 깨달아서다.
"예전에 두바이에서 일할 때 주변국 여행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결국 하지 못했어요. 특히 시리아를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미루고 미루다 결국 내전이 나서 가지 못했죠. 나중에 갈 수 있을줄 알았는데 그 '나중'이란 것이 오지 않을 수도 있더라구요."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두 달간 동남아 국가를 여행했다.
"여행을 워낙 좋아해서 네팔, 조지아, 쿠웨이트처럼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도 많이 다녀왔는데, 동남아를 한번도 가지 않았더라구요. 그저 가깝다는 이유로, 언젠가 가보겠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앙코르와트를 꼭 보고 싶었고, 그래서 바로 떠났어요. 앙코르와트 보러."
물 흐르듯 여행을 하며 그는 인생을 공부했다. 앙코르와트에서 바라본 석양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됐고,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방문한 후 몰랐던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사파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들과 1박 2일 동안 험난한 트레킹을 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사람과 책은 표지보고 판단하면 안된다'는 진리를 배웠죠. 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됐죠."
그는 퇴사한 후 훌쩍 떠날 때 알아두면 쓸데 있는 노하우도 이야기했다.
"떠날 때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정말 하기 힘들게 퇴사를 결정했잖아요.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니 마음 한 편에 불안이나 후회를 두지 말았으면 해요. 잘 쉬어야 건강하게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어요."
# "여행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
학창시절에는 입시 준비에 바빴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았다.
직장에 들어간 후에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평범한 삶이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없이 무기력해졌다. 반복되는 일상에 점점 지쳤다.
황가람 씨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를 하고 시간이 좀 지나니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막연한 꿈이었던 세계 일주가 생각났는데, 숨어있던 열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열정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남편의 배려로 세계 일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나 홀로 여행길에 올랐다.
호기롭게 시작한 여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국이라면 쉽게 해결했을 일이, 타국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즐겁고 설렜다.
힘들었지만 낯선 곳에서 혼자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풍경을 감상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스페인 그라나다를 여행하던 중 고급 레스토랑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음식이 비싸서 와인 한 잔만 시키고 앉아 그 곳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이 참 행복했어요. 일행이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 쓸 일이 생기잖아요. 하지만 혼자서는 방해받지 않고 그 순간의 풍경과 분위기를 모두 누릴 수 있어 좋았어요."
여행을 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만 있으면 괜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여행을 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시선과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벗어던졌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6개월 동안 4대륙 18개국을 여행했어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행복을 느낄 때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때가 있어요. 그 순간들이 앞으로의 삶을 버티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한 여행'
축구를 좋아해서 구단에서 일을 했지만, 반복되는 빠듯한 일상에 지쳐 결국 퇴사로 이어졌다.
조유진 씨는 퇴사를 한 후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가방을 싸고 여행을 떠났다.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거든요. 일을 그만두고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일본으로 여행을 갔어요. 복잡한 심정으로 떠나왔는데, 여행을 하다 보니 필요없는 생각들은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다른 생각은 안 하고 오롯이 나만 생각했어요."
홀로 떠난 여행은 마냥 행복했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변의 화려한 풍경을 보거나,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일이 안 풀리면 누군가를 탓하기 바빴는데, 여행을 하며 나에게만 집중하다보니 남탓을 하기보다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됐어요. 여행하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였죠."
또 다른 마음의 변화도 일었다. 그토록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여행하는 중간에도 떨칠 수가 없었다.
"일이 싫다고 생각해 떠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그 일을 하고 있어요. 이 일을 하는 게 지금은 너무 즐거워요. 요즘은 여행을 가면 쉬기도 하지만, 그 나라의 축구 문화도 꼭 돌아봐요. 여유도 즐기고, 자기계발 방법도 알게 된 거죠. 힘든 시기에 여행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공지영·강효선기자 jyg@kyeongin.com·사진/이고은·황가람·조유진씨 제공/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