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광복서딴 사명… 창고에서 보관·운송 업무로 첫발
1980년대 중동 건설 붐때 해외 하역 작업 통해 급속 성장
발전소·교량 자재 등 운송 도맡아·양곡 사일로 현대화도
2005년에 컨 진출… 2015년엔 야드 자동화 컨터미널 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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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개항한 인천항이 지난해 304만 8천TEU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며 전 세계 40위권 항만으로 성장한 데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향토 하역사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향토하역사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선광(鮮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광은 인천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천 신항에서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을 운영하며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3분의 1 가까이 처리하고 있다.

인천항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다. SNCT는 지난해 82만TEU에 달하는 물동량을 처리했다.

 

이런 선광도 1948년 창업 초기에는 작은 창고에 불과했다. → 연혁 참조

1969년2월10일 인천화력발전소 1호기 트랜스포머 부선 운송작업
1969년 2월10일 인천화력발전소 1호기 트랜스포머 부선 운송작업.

#선광의 태동


선광은 인천 신항을 중심으로 한 컨테이너 하역사업과 평택·군산 등 지역에서의 항만 하역사업, 중량물 운송, 보관 물류, 사일로 사업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 선광문화재단 등을 통한 사회공헌사업도 충실히 진행하고 있다.

선광은 해방 이후 인천항의 세관 창고를 기반으로 보관과 운송 사업을 시작하면서 태동했다.

70년 전인 1948년 4월이다. 창업주인 고(故) 심명구 전 회장은 선광공사라는 이름으로 인천에서 세관 창고를 임대받아 물건을 보관하고, 내주는 일을 시작했다.

심명구 전 회장의 형제는 모두 5명으로, 형님 고(故) 심봉구 씨와 세관장을 역임한 첫째 동생 고(故) 심영구 씨, 서울대 경영대학장을 역임한 고(故) 심병구 씨, 지역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심정구 명예회장(87) 등이다.

선광이라는 사명은 '조선'과 '광복' 두 단어에서 각각 선(鮮)과 광(光)을 가져와 정했다. 당시는 국민들 사이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보다는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시기였다.

창립 당시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동 주민센터 인근의 작은 공간이었다.

당시 세관으로부터 임대를 받은 현재 중부경찰서 인근 창고는 선광의 모체가 됐다. 선광은 사세가 확장하면서 사업 영역을 통관 사업까지 넓혀 개인 회사에서 1961년에 법인 사업자로 전환했다.

현재 선광문화재단과 인근의 건물을 사무실로 쓰다가 1985년 양곡 사일로를 건설하며 현재의 중구 항동7가 자리로 이전했다.

선광은 현재 고(故) 심명구 회장의 장남인 심장식 씨가 회장직을, 차남인 심충식 씨가 부회장을 맡아 이끌고 있다.

특히 심장식 회장은 IMF 외환위기 때 경인리스와 국민리스 등을 인수, 투자금융 전문 업체인 화인파트너스를 운영하면서 금융 분야까지 사업 영역을 다양화하는 등 회사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선광사이로1985년
1985년 준공 당시 사일로.

#도약과 성장


선광은 1980년대 초반 리비아 진출을 선광의 도약기로 보고 있다. 중동 국가들이 오일달러를 이용해 대규모 토목 및 건설공사를 진행해 대한민국에 중동 건설 붐이 일던 시기였다.

선광은 리비아 브레가항, 미스라타항, 벵가지항만 등에 하역노무자와 관리직 등 450여 명 규모의 국내 직원을 보내 해외항만 하역 작업에 나섰다. 이후 약 10여 년간 건설 기자재 등 하역작업을 통해 연간 2천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는 등 선광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중량물 운송사업 진출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경제 발전을 최우선시하던 3·4공화국 시절 현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발전소, 교량 건설자재 등 대형 설비를 수입해 설치하려는 국내 수요가 많았다.

선광은 이런 수요를 흡수하고자 했다. 한강 철교 자재와 인천화력발전소 시설 등도 선광이 운송했다.

1970년대에 인천항 제2선거 부두시설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2선거 이전까지 항만 시설이 부족해 외항에서 하역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역을 위해선 부선이 필요했는데, 내항이 갖춰지면서 부선이 활용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선광은 이들 부선을 이용해 해사 채취 사업을 시작했다.

선광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가 생기고 양곡 수입이 급증하자 1985년 내항과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하는 사일로를 건설해 운영했다.

재래식으로 이뤄지던 양곡 하역은 이 사일로 건설로 대폭 현대화됐다. 이 사일로는 선광이 일반 화물 하역 사업에 국한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에 진출해 안정적인 이익을 올리는 탄탄한 기반이자 선광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1996년 해양수산부 출범 이후 1997년 부산항과 동시에 인천항에 부두운영회사제(TOC)가 도입되며 선광은 내항의 자동차 전용부두인 5부두 운영을 시작한다.

IMF 외환위기 후 많은 기업이 안정적이고 소극적인 경영 전략을 펼 때 선광은 오히려 적극적인 투자를 했다. 인천항의 고질적 체선 해소를 위해 산업원자재 종합 처리 항만으로 건설된 인천 북항에 다목적부두를 건설 투자해 운영했다.

인천을 기반으로 성장한 선광은 군산과 평택 등 국내 다른 항만으로도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선광은 인천항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군산항에 양곡 하역 및 보관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 2005년 군산항 6부두에 양곡 터미널을 개장했다.

이 양곡 터미널의 일시 보관 능력은 50만t 규모로 국내 최대 수준이라고 한다.

선광은 평택항에도 진출했다. 2010년 서부두에서 한일시멘트의 슬래그 하역작업을 시작했고, 2018년엔 현대글로비스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자동차 전용부두를 개장해 인천항에 이어 평택항에서도 전문적인 자동차 하역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SNCT
1948년 작은 창고로 시작한 향토 하역사 선광은 70년이 지난 현재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3분의 1 가까이를 처리하고 있는 하역사이자 종합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선광이 인천 신항에서 운영하고 있는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 전경. /선광 제공

#선광의 미래

컨테이너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기로 한 것도 중요한 결정이었다.

전 세계적인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와 일반화물의 컨테이너화에 따라 컨테이너터미널의 중요성은 높아졌다. 우선 2005년 인천 내항과 인접한 남항에 선광인천컨테이너터미널(SICT)을 개장해 컨테이너 터미널 사업에 진출했다.

SICT 개장 후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중국 등 주 교역 상대국과의 급격한 교역량 증가와 선박 대형화로 컨테이너 항만시설의 대형화와 현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역 선두 하역 기업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있던 선광은 인천 신항 운영자 참여를 결심하고 인천항 최초로 야드 자동화가 실현되는 컨테이너터미널을 계획했다.

선광은 2010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약 3천억 원의 대규모 사업비를 투입해 2015년 6월 마침내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을 개장했다.

SNCT는 인천을 찾는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발전된 인천항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장소가 됐다.

글로벌 기업들과 무한경쟁해온 물류기업 선광은 그동안 동북아 물류 허브가 되기 위해 유수의 항만들과 경쟁해 온 인천항과 함께 성장해왔다.

심정구 명예회장은 "선광은 인천에 터를 잡고 인천항과 함께 70년 동안 꾸준히 성장하며 인천에 많은 신세를 졌다"며 "앞으로도 인천의 성장에 보탬이 되고 인천시민의 사랑을 꾸준히 받을 수 있도록 성실히 역할을 해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